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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 이끈 한국경제 '큰 별'이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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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0월 어느 날. 미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짓는 기초공사 감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승윤 교수가 지프를 타고 달려왔다. 청와대에서 재무장관으로 낙점해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는 것이다. 나는 공사판에서 흙이 묻은 구두를 그대로 신고 청와대로 들어가 임명장을 받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 후 나는 14년여 동안 정부 관료의 쓴맛 단맛을 톡톡히 본 셈이다.”(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저서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발췌 요약)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을 주도한 남덕우 전 총리가 18일 오후 9시55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던 고인은 박정희, 박근혜 ‘부녀(父女)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깊은 인연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월13일 청와대에서 취임 후 처음 열린 국가원로 초청 간담회에서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1979년 10·26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한 달 뒤쯤인 11월 21일 남 전 총리는 박 대통령 등 유족이 청와대를 떠나 서울 신당동 옛 사저로 옮길 때 동행하며 권력무상의 냉혹한 시절에 의리를 지킨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24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5년 국민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와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에서 각각 경제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9년 박 전 대통령에 의해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된 뒤 1974∼1978년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며 한국의 고속성장을 이끌었다. 1972년 8·3 사채 동결 긴급조치, 수출 100억달러 및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 부가가치세 도입 등 한국 경제에 획을 그은 큰 결정이 그의 손을 거쳤다. 박 전 대통령은 생전에 “우리나라의 경제대통령은 남덕우”라고 평할 정도로 그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고 한다. 고인이 우리 경제의 산증인으로서 ‘한강 기적의 주역’, ‘서강학파의 대부’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 전 총리는 전두환 전 대통령 집권시인 1980∼1982년 제14대 국무총리를 지낸 뒤 1983년부터 1991년까지 18∼20대 한국무역협회장으로 재직했다.

편히 쉬소서 ‘한강의 기적’을 이끈 남덕우 전 국무총리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19일 조문객이 고인의 영정 앞에서 참배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남 전 총리는 관계를 떠난 이후에도 경제계의 원로로서 정치권과 인연을 이어가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한나라당 유력 대권주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자문단 좌장을 맡아 ‘근혜노믹스(박근혜 경제정책)’ 입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 대통령이 지난 3월 취임 후 처음으로 가진 국가 원로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남 전 총리는 박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앉아 주목을 받았다. 두 사람이 1970년대 박 전 대통령의 ‘영애’와 경제 책임자로서 만난 이후 청와대에서 이뤄진 두 번째 해후였다. 남 전 총리는 간담회에서 원로그룹의 지혜를 구하는 박 대통령에게 “민주주의 가치와 시장경제 준수를 미래세대에 잘 교육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수년간 전립선암을 앓아온 고인은 최근 노환이 겹쳐 병세가 급속히 악화했고, 지난 6일 서울 강남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장례는 한덕수 무협 회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사회장으로 진행된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혜숙씨와 장남 남기선 ㈜EVAN 사장, 차남 남기명 동양증권 전무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고인은 22일 영결식이 거행된 뒤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천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