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의 갈지자 행보부터 그랬다. 여당은 ‘경제민주화’ 보따리를 집었다 놨다 하며 눈치를 봤다. 재계의 반대도 만만치 않다. 국회의 경제민주화 관련법 논의는 지지부진했다. 팽팽한 여야 줄다리기에 시선이 온통 쏠리고 있었다. 갑자기 경제민주화 협상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라면 상무’ 사건이 터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빵 회장·남양유업 사태가 잇따랐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치도곤을 맞는 갑들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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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홍 수석논설위원 |
갑이 을을 억누르는 불공정 거래의 관행이 낳은 부작용은 또 있다. 어법에도 맞지 않는 지나친 존댓말이다. 사물이나 형용사에 존칭을 붙이는 이상한 높임말, 필요없는 미사여구가 난무한다. “여기 잔돈 있으십니다” “2000원이십니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교환은 가능하시고 환불은 안 되십니다” “오늘 날씨가 더우십니다”…. 서비스 업종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이른바 을의 언어다. ‘손님은 왕’이라며 ‘고객만족’ ‘1등 서비스’를 지향하는 친절 교육이 낳은 괴물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 떠돈 LG유플러스 고객센터 상담원 녹취록이 화제가 됐다. 귀가 어두운 할머니의 동문서답을 고객센터 직원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끝까지 친절히 응대한다. 처음엔 웃다가 할머니 못지않은 고객센터 직원의 끈기가 안쓰러워졌다. 어지간하면 “전화를 잘못 거셨다”고 할 법도 하건만 미련스러울 정도로 “LG유플러스 고객센터”를 되풀이한다. 과잉 친절이 안쓰럽다 못해 답답하다. 이 녹취록은 상담 직원의 인내심과 친절함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사내 교육자료라고 했다.
을의 언어가 한글 파괴의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데도 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무감각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 겉으로는 귀에 거슬린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불편한 과잉 서비스가 싫지 않은 것이다. 감정을 억누르고 일해야 하는 ‘감정노동자’가 6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 앞에서 갑 행세를 하려는 을들이 생각과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불쾌한 을의 언어는 바로잡을 수 없다.
영원한 갑, 영원한 을은 없다. 관계에 따라 갑이 되기도 하고 을이 되기도 한다. 을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친절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고 했다.
누구의 말처럼 지나친 친절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적절한 불편’을 원해서가 아니다. 넘치지 않는 공정한 서비스에 만족할 일이다. 어느 백화점이 협력사의 고충을 이해하고 소통을 확대하기 위해 실시한다는, 본사와 협력사 직원이 서로의 역할을 바꿔보는 ‘롤플레잉 교육’, 갑과 을도 해보자. 그러면 을의 언어도 달라지지 않겠나.
김기홍 수석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