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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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한의말글못자리] 경험 이야기의 소중함

실제 일어나거나 경험한 사건의 서술을 싸잡아 ‘경험 이야기’라고 한다. 실화를 줄거리(스토리) 있게 다룬 것인데, 알고 보면 엄청나게 많다. 작자의 개인적 경험 위주의 수기, 자서전, 수필 등과, 집단적 경험 중심의 논픽션, 다큐멘터리, 르포 등이 이에 속한다. 오늘날 가상공간에 떠도는 여러 경험 이야기들은 분류가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하다.

그 많은 종류 가운데,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서 가장 널리 중요시된 경험 이야기는 기행(紀行), 곧 여행 이야기이다. ‘왕오천축국전’ ‘동방견문록’ ‘열하일기’ 등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의 놀라운 여행기이다. 아득히 먼 곳의 진기한 문물을 기록한 그것들은 문명의 교류에 크게 이바지했다.

외국을 이웃처럼 오갈 수 있고 온갖 기록과 통신이 휴대전화 하나로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언론 매체마다 여행과 관련된 고정란이나 프로그램이 있고, 글과 사진이 혼합된 안내서가 서점에 늘비하다. 기행은 ‘길 이야기’이므로 여행하는 시간, 공간의 변화에 따라 줄거리가 형성되어 비교적 쉽게 지을 수 있다. 저자가 내용을 보증하니 공감을 얻기도 어렵지 않아, 다른 갈래들보다 여럿이 참여하는 편이다.

경험 이야기의 핵심은 담긴 경험의 깊이와 가치이다. 여행기를 짓는다면, 어디서나 검색이 용이하니 지리 정보의 나열은 지루하며, 아마존 정글까지 카메라가 보여 주기에 신기한 것도 드물다. 따라서 되도록 새롭고 유익한 경험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경험에 사색의 깊이를 더하고 관련 정보를 융합함으로써 통찰의 폭을 넓히는 노력도 요구된다.

애초 목적이 관광이든 경제 활동이든, 한국 사회는 경험을 서술하는 일에 대한 관심이 낮은 편이다. 식민 지배와 전쟁, 권위주의 정권 등을 거치며 몸을 사린 탓에, 겪은 것을 타인과 소통하고 사회화하는 노력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거기에는 타인의 뜻있는 체험을 발굴하고 공유하려는 노력도 포함된다.

경험을 정리하고 기록하여 전하는 일은 매우 소중하다. 아무리 인상적인 것이라도, 나에게나 남에게나, 또 현재에나 미래에나, 경험은 적절히 표현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은 거나 같기 때문이다. 역사는 다름 아닌 경험의 축적이다.


최시한 작가·숙명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