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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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규의한·미동맹사] 1968년 한반도 안보 위기와 한·미 안보협력체제의 제도화

지난 11월 13일 한·미 국방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제55차 한·미 안보협의회의(Security Consultative Meeting, 이하 SCM)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한·미 안보협의회의는 1968년부터 연례적으로 개최되고 있는 한·미 간 각종 안보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최고의 협의 기구이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작전 중이던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USS Pueblo)호가 북한의 해군 초계정에 의해 피랍되며, ‘제2의 한국전쟁’의 발발 가능성에 대한 국내외적인 우려가 고조되었다.

 

2월 12일 밴스(Cyrus R. Vance) 미 대통령 특사가 방한하여 국방과 안전보장에 관한 사항을 협의하기 위한 국방 각료급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어서 같은 해 4월 17일 하와이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간의 정상 회담에서 국방 각료급의 정례회담 개최가 구체화되면서 5월에 워싱턴 D.C.에서 제1차 ‘한·미 국방각료회담’이 열렸다.

 

1971년 제4차 회의 때는 미 제7사단 철수와 관련하여 외교부(차관보급)가 참여하며 명실상부한 국가 안보 차원의 회의로 격상되었고, 그 명칭도 ‘한·미안보협의회의(SCM)’로 변경되었다. 이 연례 회의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제2조에 “안전을 위협받을 경우 상호 협의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지만 외교 경로 외에는 그 협의 기관을 명시하지 않았던 점을 이 시기에 구체화하였다는 점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보완이라 할 수 있다. 한·미안보협의회의는 1979년 10·26사태로 1980년 한 회를 건너뛴 것을 제외하고는 매년 개최되어 올해까지 모두 55차례 열렸다. 한·미안보협의회의는 국방장관회담을 중심으로 한 본회의와 이를 보좌하기 위한 한·미통합국방협의체(KIDD), 안보협력위원회(SCC), 군수협력위원회(LCC), 방산·기술협력위원회(DTICC), 공동성명위원회(JCC) 등 5개 실무분과위원회로 구성된다.

제55차 한미안보협의회의. 국방부 제공

한·미군사위원회(Military Committee, 이하 MC)는 한·미연합사 창설을 앞두고 1978년 7월 제11차 SCM 합의에 따라 양국 간 군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양국 합참의장을 대표로 하여 설치됐다. 한·미 양국의 국가통수기구는 SCM을 통해 MC에 전략지침을 하달한다. MC는 연합사의 상급 기관으로, 연합사에 전략을 지시하고 작전지침을 하달함으로써 연합사가 수행해야 할 임무·과업을 부여한다. MC는 한·미 군사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 한·미 양국의 합참의장 주재 아래 군사위원회 회의(MCM)를 하고 있다. MCM은 SCM과 연계해 같은 시기에 열리며 총 48차례 개최됐다.

 

한·미는 상호방위조약을 토대로 점차 양국 간 동맹의 범위가 확대됨에 다양한 협의체를 구성해 현안을 해결했으며, 우리의 국력과 위상이 격상됨에 따라 연합방위체제도 수평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최완규 육사 외래교수·경제사회연구원 국방센터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