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기업 고려아연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이 정치권과 해외로까지 번지는 양상이다. 야당 의원들은 중국계 자본을 등에 업은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를 규탄하고 나섰고, 해외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우방국의 공급망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 정치이슈로 번진 고려아연 사태
민병덕·박희승·정진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6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MBK파트너스(이하 MBK)의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M&A 시도를 규탄했다. 이들 의원은 “MBK파트너스가 ING생명, BHC, 한국타이어 등에 이어 이번에는 고려아연에 대해 약탈적 M&A를 시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MBK파트너스가 중국계 자본까지 등에 업고 고려아연 적대적 M&A를 시도하고 있다”며 “중국 자본과 관련 기업이 고려아연을 인수하면 세계 1위 기업의 독보적인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고 핵심 인력의 이탈도 가속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가기간산업이자 장치산업인 비철금속 제련기술을 보유한 고려아연의 특수성과 세계 1위에 오른 기술력 및 노하우를 고려할 때 현 경영진의 장기간 축적된 산업 전문성과 경영 노하우가 핵심 경쟁력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관련업계도 현 경영진의 장기적인 안목과 글로벌 네트워크가 고려아연의 지속 가능한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 “중국 자본에 매각 않겠다”는 MBK…고려아연은 “핵심기술 해외로 유출 우려”
MBK가 운영하고 있는 블라인드 펀드 상당수가 중국계 기업과 자본이 포함돼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MBK와 영풍 측은 “중국 자본에는 매각하지 않겠다”며 MBK의 해외 매각 가능성을 일축했다.
강성두 영풍 사장은 27일 기자회견에서 ‘MBK가 중국 등 해외에 고려아연을 매각할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 “저와 김광일 MBK 부회장이 회사에 존재하는 한 고려아연을 중국에 안 판다. 팔 생각이 없다”고 못 박았다.
강 사장은 왜 MBK와 손잡게 됐냐는 질문에는 “영풍은 그룹 지주회사격 회사라 그룹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며 안정적인 대규모 자금조달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필요성을 들었다.
그러면서 “집안끼리 경영을 나눠서 할 만큼의 회사 규모를 넘어서 글로벌한 경영 감각·능력·비전을 갖고 전문 경영인 체계로 가는 게 맞겠다고 판단했다”며 “MBK는 그렇게 할만한 경험과 인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사모펀드는 M&A를 통해 자본 운용 시장에서 시세차익을 거둬 출자자에 돌려줘야 한다. 투자 수익률 극대화라는 단기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이차전지 등 대한민국 전략산업과 미래 성장동력을 키우고 이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증대시키려는 고려아연을 정상적으로 경영하겠다는 것에 의구심도 제기되고 있다.
MBK는 영풍과 손잡고 지난 13일 고려아연 주식 공개매수를 시작했다. 당초 공개매수 가격 인상 없이 대응하겠다던 MBK는 지난 26일 매수가를 1주당 66만원에서 75만원으로 한 차례 상향 조정했다.
인상된 공개매수 가격 75만원은 상장 이래 역대 최고가인 67만2000원보다도 11.6% 높은 수준이다. 이에 따라 공개매수를 위한 MBK의 필요자금은 기존 1조905억~2조1332억원에서 1조2548억~2조4397억원으로 늘었다.
만일 MBK가 중국자본으로 고려아연에 대한 M&A에 성공할 경우 순수 우리 자본과 기술로 세계 1위에 오른 국가기간산업 고려아연이 역으로 중국 배제를 핵심으로 하는 우방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피해자가 될 우려도 나온다.
업계는 고려아연의 미래성장동력 중 하나인 이차 전지 분야의 경우 탈중국 글로벌공급망 구축의 핵심적인 위치에서 이탈하는 것은 물론 그동안 고려아연이 투입한 수많은 투자금 역시 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고려아연 측은 강 사장의 기자회견 직후 “영풍이 여전히 핵심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있다”며 강한 불신을 표했다. 고려아연 측은 해외로 매각이 아니더라도 비철금속 세계 1위인 고려아연의 각종 핵심기술 유출이나 기술 공유 등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고려아연의 핵심 자산을 빼가거나 수익화할 방안이 많다는 점을 MBK가 잘 알고 있다는 게 고려아연의 주장이다. 고려아연 측은 “과거 MBK가 인수한 여러 기업에서 인력 감축 등이 발생하며 사회적 문제로 비화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고 있다”고도 했다.
앞서 MBK가 인수한 ING생명은 인수 6개월만에 임원 32명 중 18명이 회사를 떠나고 일반직원의 30%에 달하는 270명 감축을 목표로 희망퇴직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우량자산 매각을 넘어 홈플러스 분할 매각에 따른 노조와의 갈등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MBK는 2015년 약 7조원에 홈플러스를 인수할 때도 인위적인 인력감축, 구조조정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경영권 인수 이후 2015년 2만 5000명이던 인력이 지난해 말 기준으로 2만명으로 5000명 가량 줄어들었다. 간접 고용 직원 역시 5000명 줄어 8년만에 1만명 가량의 직원이 홈플러스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행적을 고려할 때 MBK가 고려아연의 장기투자 및 고용승계, 일자리 창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 美 SAFE “中 지원받는 MBK의 공개매수, 적대적 M&A” 규정
미국 등 해외 주요국가의 우려도 언급했다. 실제로 최근 미국 에너지 안보 분야 싱크탱크인 ‘SAFE’가 MBK의 약탈적 공개매수 시도를 ‘적대적 인수 시도’로 규정하고, MBK와 중국과의 강력한 유대 관계에 우려를 표한 바 있다.
SAFE는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링크드인에 올린 게시물에서 MBK를 “중국의 지원을 받는 한국의 사모펀드 회사”로 규정하면서 “MBK와 영풍이 지난주 세계 최대 정제 아연 생산업체이자 배터리 제조에 필수적인 기타 소재 주요 생산업체인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인수 시도를 시작했다”며 “MBK와 중국과의 강력한 유대 관계를 미국과 동맹국들이 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SAFE는 이번 인수 시도가 중국 제련소들의 원료 공급 부족으로 중국의 정제 아연 수입이 증가한 시기와 맞물린다고 분석하면서 “한국에서 니켈 정제 능력을 심화하고 있는 고려아연에 대한 인수는 여러 핵심 광물의 공급망에 잠재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호주 정치권 인사들 역시 MBK 인수가 성공할 경우 고려아연이 영위하고 있는 호주 내 신재생에너지 사업과 일자리 창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는 설명이다.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인 고려아연은 전자, 반도체, 자동차, 이차전지 등 국내 첨단산업에 다양한 기초 소재를 공급하는 공급망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고려아연은 지난 24일 정부에 자사의 이차전지 양극재 핵심 원료인 전구체 제조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한 상태다. 이 기술이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되면 정부가 외국 기업에 의한 인수·합병을 승인할 권한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