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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통의 가족’ 허진호 감독·김희애…“신념·도덕 살면서 무너지기도”

사람 좋고 교과서 같은 소아과 의사 재규가 한적한 숲길을 차로 달린다. 갑자기 쿵. 앞 유리가 깨진다. 놀란 재규의 눈 앞에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고라니 한 마리. 카메라는 재규가 핏자국을 남기며 고라니는 질질 끌어 길가로 옮기는 장면을 하늘 높이서 바라본다.

 


16일 개봉하는 영화 ‘보통의 가족’의 한 장면이다. 갑자기 길로 뛰어드는 고라니처럼, 인생에는 뜻하지 않게 가해자가 되는 순간도, 나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는 순간도 있다. 이 영화는 재규와 형 재완, 두 형제가 예기치 못한 사건을 맞닥뜨리며 겪는 변화를 담았다. 

 

형 재완은 변호사다. 수완 좋고 재력이 탄탄하다. 아내 지수는 한참 어린데다 아름답다. 동생 재규는 소아과의사. 복작복작한 병원에서 일하고 생활의 때가 가득한 집에서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연상인 아내 연경은 해외봉사를 다니는 성공한 프리랜서 번역가로 교육에 간병까지 묵묵히 해낸다.

 

영화는 물과 기름처럼 다른 두 부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연경은 젊음과 미모를 무기로 부자 남편을 얻은 듯한 지수를 무시하고, 돈 밖에 모르는 듯한 형은 어머니 간병 노동을 은근히 동생에게 떠넘긴다. 물밑에서는 신경전이 벌어지지만 겉보기에 이들은 성공한 형제다. 이들 부부의 삶은 자녀들의 범죄 현장이 담긴 폐쇄회로(CC)TV가 등장하면서 급격하게 무너진다. 

 


이 작품은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덕혜옹주’(2016)를 연출한 허진호 감독의 신작이다. 네덜란드 작가 헤르만 코흐의 베스트셀러 ‘디너’를 원작으로 한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언론과 만난 허 감독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가 가진 신념이나 도덕적 기준, 윤리가 어느 순간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도덕, 윤리처럼 거창하진 않더라도 누구나 살아가는 기준들이 있을 거예요. 보통 이를 일관성 있게 가져가죠.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런 것들이 허물어져 버려요. 그게 자식에 대한 문제라면 저도 어떤 행동을 취할지 자신이 없더라고요. 사람은 양면적인 면이 많잖아요. 이 영화에서 옳고 그름을 얘기하거나 형제 중 한 편을 들려 하진 않았어요. ‘사람이 그래도 된다’는 아니지만 ‘사람이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하지 않을까 했죠.”

 


이 영화는 허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수렵총으로 멧돼지를 잡는 형과 뜻하지 않게 고라니를 로드킬하는 동생 같은 장면들로 두 형제의 성격을 대변하고, 오가는 대화 속에 부부 네 명의 미묘한 성격 차이를 잡아낸다. 처음에는 ‘속물 변호사’ ‘결혼에 성공한 젊은 여성’처럼 전형적으로 보이던 형·동생 부부가 극이 진행될수록 다른 면이 드러나는 과정도 흥미롭다.

 

네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살린 데는 배우들의 공도 크다. 형 부부는 설경구와 수현, 동생 부부는 장동건과 김희애가 연기한다. 허 감독은 “설경구 배우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끝나고 일본 영화제를 갔다가 우연히 술집에서 만났는데 술을 꽤 많이 마셨다. 굉장히 친해졌다”며 “그게 굉장히 좋은 기억이었고, 같이 작업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다가 이번에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설경구 배우에게는 굉장히 냉철하고 그러면서 어느 정도 거리도 있는 재완 같은 느낌이 좀 있었다”고 했다. 

 

장동건에 대해서는 “재규 역에 맞는 면이 있었다. 재규는 보기에 선했으면 했다”며 “장동건 배우가 연기에 대해 고민할 때 ‘동건씨 같이 했으면 좋겠다, 다른 모습을 크게 보여주지 말고 본인의 모습을 연기하면 어떨까’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김희애 배우는 워낙 영화 시작 전부터 좋아하는 배우였어요. 제가 군대 있을 때 벽에 이 배우의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곤 했죠. 이번에 작업해보니 정말 편한 배우였어요. 수현 배우는 실제로 만나 보니 되게 밝았어요. 그늘이 없어 보이고 맑고 밝은 느낌이 있어서, 지수란 인물에 맞았죠. 현장에서 이 네 배우가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장면들이 각각 따로 찍는 장면보다 훨씬 재밌었어요. 보통 영화 촬영하면 힘든 장면에서 다들 약간 날이 설 때가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경우가 한번도 없었어요.”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마인드마크 제공

같은 카페에서 만난 김희애는 허 감독과의 작업에 대해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그는 “연기에 정답은 없다. 사람마다, 같은 사람도 그 순간이나 특정 요소에 따라 연기가 달라지기에 연기에는 수많은 정답이 있을텐데, 감독님은 연기에 대해 계속 열려 있는 분”이라며 “그래서 더 힘들 수도, 더 창조적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경우는 완전히 처음이었어요. 보통 첫날 대본 리딩할 때는 한번 쫙 읽고 ‘밥 먹으러 가자’ 하는 게 관행이에요. 감독님은 대사 한 줄을 그냥 안 넘어 가는 거예요. ‘이 대사는 왜 한 것 같아, 김희애씨 생각은 어때,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희애는 “아, 이 분은 작업을 이런 식으로 하시는구나, 그래서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이 간다’가 나왔구나 싶었다”며 “이 분의 세계에 푹 빠져보자 했고, 그렇게 나온 결과에 만족한다”며 웃었다.

 

그는 자신이 연기한 연경에 대해서는 “그만하면 착하고 평범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돌려서 얘기하지 않고 당사자 앞에서도 얘기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시어머니 간병도 하는 거 보면 솔직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 같다”고 평가했다. 

 

허 감독은 ‘보통의 가족’ 촬영 당시 김희애가 자기 촬영이 모두 끝나도 자리를 뜨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다른 배우가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운 점이 인상 깊었다고 밝혔다. 김희애는 이에 대해 “전 (촬영 후 바로) 제 얼굴 모니터하는 거 힘들어하는 스타일”이라며 “연기하면서 느끼는 건 상대배우에게 잘해줘야겠다, 그 사람한테 잘해야 저한테 온다는 것”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시청자가 관객에게 제 연기가 잘하게 보이고 싶었고, 좀 지나니 모니터 앞에 모인 스태프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었어요. 요즘은 내 바로 앞의 배우에게 잘 보이고 싶어요. 그 사람이 제 연기로 인해 좋은 연기를 하면, 그게 저한테 좋은 연기로 돌아오는 선순환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상대배우가 연기할 때 최대한 집중할 수 있게 해줘요.”

 

김희애는 이번에 함께한 세 명의 배우와도 선순환을 느꼈다며 “다 진짜로 하는 배우들이니까, 눈을 보면 이 사람이 딴 생각을 하는지 진짜로 연기하는지 다 안다”고 말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