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우리나라와 수교한 지 올해 73주년을 맞은 유럽의 전통우호국이다. 과거에는 투우와 축구의 나라로만 알려졌으나 최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주요한 유럽 관광지다. 관광뿐 아니라 양국의 경제· 문화 교류도 활발해지는 등 주요한 관심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은진의 ‘에스파냐 이야기’ 연재를 통해 켈트, 로마, 이슬람 등이 융합된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소개한다.
세비야 사람들의 생활 양식을 보려면 산타크루즈 지구로 가야 한다. 이곳은 세비야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역사지구이다. 중세 유대인이 세운 정착촌이 이 지역의 시초이며, 이후 유대인 집중 거주 지역으로 번성했다. 안달루시아주 고유 양식의 고풍스러운 주택, 많은 역사적 건축물, 좁고 미로처럼 얽혀 있는 거리 등 옛 모습 그대를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활 중심지 역할을 하는 크고 작은 많은 광장 등이 어우러져 과거 세비야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독특한 곳이다.
스페인은 한 집 건너 바가 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바가 있다. 바는 가장 스페인 스러운 곳이다. 바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고, 대화가 있다. 다소 수다스러워 보이지만 그만큼 스페인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이유이다. 필자는 어느 도시를 가든 하루에 2∼ 3번씩 바에 들러 커피를 마신다. 바마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만든 타파스를 내놓는다. 세비야 사람들은 그 타파스와 와인 맥주를 시켜놓고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을 즐기고 있다. 메뉴판을 보니 절인 생선인 페스카이토, 작은 속을 채운 롤, 달팽이 요리, 피노(화이트 와인)나 만사니야(달콤한 와인)가 있다. 이곳에 오면 꼭 맛보길 권한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무리요 공원(Jardines de Murillo)이 나온다. 이곳은 세비야 태생의 궁정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토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를 기리는 곳이다. 유대인 빈민가에서 성장한 무리요는 또 다른 궁정화가이자 거장인 벨라스케스의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 바로크 거장으로 스페인의 라파엘로라고 불린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종교화 <존자의 무염시태>는 성모 마리아가 파란색과 흰색 옷을 입고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달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무염시태를 표현하고 있다. 빛과 구름과 천사들로 가득 찬 천상의 공간 중간에 마리아를 배치하는 구도와 승천하려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무염시태 교리는,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가톨릭의 교리이다. 스페인에서의 무염시태라는 그림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스페인에서는 다른 곳에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인정받은 수태주의 신앙을 200년 전부터 교리로 고수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무리요는 평생 20여 점의 무염시태 그림을 그렸다. 당시의 다른 스페인 화가들보다 더 많은 숫자를 그렸다.
무리요는 종교화 말고도 일상화도 그렸다.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어린 거지>이다. ‘이가 난 소년’으로도 알려진 이 작품은 세비야 거리의 고아가 이를 잡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석양 무렵 햇살과 그림자의 대조를 사용하였다. 소년의 발 앞에 놓인 몇 개의 새우 껍질이 소년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알려주고 있다. 가난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하고 있다.
세비야 시는 거장 무리요를 기리기 위해 2017년을 ‘무리요의 해’로 지정하고 1년 동안 기념사업을 가졌다. 산타크루즈 지구 내에 있는 카사 데 무리요는 그가 말년에 지낸 곳을 생가박물관 형식으로 꾸며놓았다. 사람은 죽더라도 예술혼은 그대로 남는다.
이은진 스페인전문가·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