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의 ‘서스펜디드 영웅’이 무너졌다. 그것도 공 2개 만에. 하루 만에 극과 극의 결과를 마주한 전상현의 회복 여부에 따라 남은 2024 KBO리그 한국시리즈(KS·7전4승제)에서 KIA 불펜 전체가 요동칠 수도 있다. 그만큼 충격적인 결과다.
이번 KS는 1차전이 ‘2박3일’ 간 열렸다. 지난 21일 빛고을 광주를 적시는 비에도 1차전을 강행했다. 비로 인해 66분이나 지연된 끝에 7시36분에야 플레이볼을 선언할 수 있었다. KIA 제임스 네일과 삼성 원태인의 명품 투수전으로 진행된 1차전은 6회 삼성의 ‘KIA 킬러’ 김헌곤이 네일의 스위퍼가 가운데로 몰린 것을 놓치지 않고 벼락같은 솔로포를 터뜨리면서 상황이 묘하게 흘렀다. 흔들린 네일은 디아즈에게 볼넷을 내준 뒤 강판당했고, 이어 마운드에 오른 장현식마저 강민호에게 볼넷을 내줘 무사 1,2루 위기에 몰렸다.
오락가락하던 빗줄기는 그 상황에서 더욱 굵어져 경기는 중단됐고, 45분을 기다린 끝에 오후 10시9분에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됐다. KBO리그 포스트시즌 역사상 첫 서스펜디드 게임이었다. 5회를 넘겼음에도 강우콜드가 아닌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된 것은 삼성의 득점이 1~5회 사이에 나온 게 아니라 6회초에 나왔기 때문이다. KIA에게도 6회말 공격이 주어져야만 강우콜드 요건이 성립될 수 있었다. 설사 1-0으로 6회말까지 끝났다고 해도 KBO 입장에선 고작 한 점차 승부에 한국시리즈 경기를 강우콜드를 선언하기는 꽤나 부담스러웠던 것도 작용한 처사였다. 22일 재개될 1차전과 뒤이어 열릴 2차전은 그라운드 사정과 비 예보로 또 한번 순연됐다.
무려 40시간 만에 재개된 KS 1차전. 관심은 KIA가 마운드에 누구를 올릴지, 삼성이 어떤 작전으로 나설지에 집중됐다. 타석은 좌타자 김영웅. 우완보다는 좌완에 약점이 있는 김영웅인데다 이번 KS에 KIA는 좌완 불펜 요원만 5명(최지민, 곽도규, 이준영, 김기훈, 김대유)을 포함시켰기에 좌완 불펜 중 1명이 마운드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KIA 이범호 감독의 선택은 우완 전상현이었다. 마무리 정해영 앞에서 8회에 마운드에 오르는 ‘프라이머리 셋업맨’인 전상현을 6회초에 올린 것이다. 제구가 뛰어나 볼넷을 줄 위험이 적고, 좌우를 가리지 않고 안정적인 투구를 보이는 데다 현재 KIA 불펜 내에서 가장 구위가 뛰어나다는 것까지 고려한 선택이었다.
이 감독의 선택은 적중했다. 삼성 박진만 감독이 너무나도 평범한 희생번트 작전을 들고나온 것까지 시너지를 이뤘다. 정규시즌 내내 희생번트를 딱 1개 성공했던 김영웅의 번트 타구는 포수 바로 앞에 떨어졌고, 3루로 뛰던 2루 주자 디아즈는 포스아웃당했다. 이어 타석에 선 박병호는 전상현을 상대로 통산 10타수 1안타로 철저히 눌렸던 타자. 상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삼진을 당했다. 전상현은 윤정빈에게 볼넷을 내줘 2사 만루에 몰렸지만, 이재현을 투수 앞 땅볼로 잡아내고 위기를 벗어났다. 7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전상현은 선두타자 류지혁을 유격수 실책으로 내보냈으나 김지찬에게 희생번트를 허용한 뒤 김헌곤을 삼진으로 잡아내고 등판을 마쳤다. 이어 올라온 곽도규가 디아즈를 3구 삼진으로 잡아내면서 2사 2루 위기를 탈출했다.
KIA는 7회 공격에서 2사 2,3루 찬스에서 임창민-강민호 배터리의 연이은 폭투와 소크라테스, 김도영의 연속 적시타로 4-1로 역전에 성공했고, 8회 1점을 추가해 5-1로 이겼다.
승리의 주역은 당연히 전상현이었다. 데일리 MVP 역시 전상현의 차지였다.
1차전 승리 여파는 2차전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KIA 타선은 삼성 선발 황동재를 1회부터 난타하며 5-0 리드를 잡았고, 8-3 승리를 거뒀다. 1,2차전을 모두 내줄 수 있는 위기에서 독식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전상현의 재개된 6회 무실점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전상현은 ‘서스펜디드 영웅’으로 등극했다.
하루 쉰 뒤 무대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이하 라팍)로 옮겨 25일 진행된 KS 3차전. 올 시즌 홈런 185개로 팀 홈런 1위, 라팍에서만 120개를 몰아친 삼성 타선은 광주에서와는 세기가 달랐다. 3회 이성규, 5회 김영웅의 솔로포로 2-0으로 앞서나갔고, KIA는 6회 2사 2루에서 최형우의 적시타로 2-1로 따라붙었다.
KIA의 7회말 수비. 이범호 감독은 또 한 번 마운드에 전상현은 조기에 출격시켰다. 7회를 무실점으로 막고 남은 2이닝 공격에서 역전을 해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마운드 교체였다.
재개된 1차전에서 주자 2명을 두고 마운드에 올랐음에도 자신의 공을 씩씩하게 뿌려댔던 전상현은 이날은 주자 없는 상황에 올랐지만, 1차전과는 달랐다. 구위를 제대로 볼 시간도 없었다. 전상현이 마운드를 내려가기까지 던진 공이 딱 2개에 불과했기에.
선두타자 김헌곤을 상대로 던진 초구 시속 143km짜리 직구는 바깥쪽 높은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했으나 그대로 통타당했다. 타구는 115m를 날아가 좌중간 펜스에 꽂혔다. 3-1.
이어 타석에 들어선 박병호. 그는 1,2차전 9타수 무안타에다 이날도 앞선 두 타석에서 병살타, 삼진까지 이번 KS에서 11타수 무안타로 극도의 부진에 빠져있던 타자였다. 전상현의 초구는 시속 138km짜리 슬라이더. 바깥쪽 중단 스트라이크존에 잘 걸치는 공이었지만, 이번엔 박병호의 방망이가 앞선 11타석과는 다르게 호쾌하게 돌았다. 타구는 무려 120m를 쭉쭉 날아가 이번에는 우중간 담장을 넘어갔다. 4-1이 됐다.
연이어 초구가 통타당해 순식간에 2실점을 한 전상현. KIA 벤치는 그를 더 마운드에 두지 않았다. 좌완 이준영을 올렸다. 1차전 ‘서스펜디드 영웅’이 하루만에 2구에 피홈런 2개로 철저하게 무너진 것이다.
KIA는 8회 1점을 따라붙고, 9회 삼성 마무리 김재윤을 2사 만루까지 몰아붙였으나 박찬호가 3루 땅볼로 물러나면서 2-4로 패했다. 아직 시리즈 전적은 2승1패로 KIA리드지만, 이대로 4차전까지 라팍을 등에 업은 ‘메가 라이온즈포’에게 당한다면 광주로 돌아가더라도 KS 우승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상현은 4차전에서도 등판이 가능하다. 3차전에도 던진 공이 딱 2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상현이 4차전에서 ‘서스펜디드 영웅’ 모드냐, ‘2구 피홈런 2개’ 모드냐에 따라 이번 시리즈 KIA 불펜 전체 그림이 바뀔 수 있다. 이범호 감독은 전상현을 8회에 등판하는 ‘프라이머리 셋업맨’뿐만 아니라 ‘하이 레버리지’(긴박한 상황)이면 8회가 아니어도 등판시키는 불펜의 키맨으로 쓰고 있다. 과연 전상현의 4차전 등판은 어떤 결과가 나올까. 시리즈 전체를 좌우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