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7일 회장 취임 2주년을 맞았다. 이 회장은 ‘삼성의 1호 영업사원’으로서 전 세계 정부 고위급 인사, 빅테크 최고경영자(CEO) 등과 잇따라 회동하며 글로벌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포괄적 협력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정작 회사는 글로벌 경기침체로 인한 경영환경 악화, 흔들리는 ‘초격차’ 전략과 어수선한 내부 분위기, 사법리스크 등으로 내우외환에 휩싸였다.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은 이날 별다른 취임 2주년 기념행사 없이 보냈다. 이 회장은 2년 전 취임 일성으로 기술, 인재 중시 경영 철학을 강조하며 ‘JY 체제’의 삼성이 나아갈 방향을 예고했다. 그는 “창업 이래 가장 중시한 가치가 인재와 기술”이라며 “세상에 없는 기술에 투자하고 성별과 국적을 불문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 회장은 전 세계의 삼성 사업장을 방문해 임직원을 격려하고 굴지의 글로벌 대기업 CEO들과 만나며 기술 혁신을 도모했다. 올해 6월에 2주 간 미국 출장길에 올라 세계 최대 이동통신사인 미국 버라이즌, 글로벌 정보기술(IT)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메타, 아마존, 퀄컴 등 주요 기업 CEO들과 미팅을 갖고 한층 더 깊은 협력 관계를 구축한 것이 대표적이다.
연구개발(R&D) 투자액은 매 분기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한파’로 인한 최악의 실적에도 4분기 R&D에 역대 분기 최대인 7조5500억원을 투자했고, 올해 1분기엔 7조8200억원, 2분기 8조500억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경영 철학은 최근 대두되는 ‘삼성 위기설’로 가려진 상태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부상한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은 경쟁사에 밀려 저조한 실적의 배경이 됐고,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사업은 글로벌 1위인 대만 TSMC와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2017년 9조원을 투자한 하만 인수를 마지막으로 조 단위 인수합병(M&A)은 7년째 맥이 끊기며 미래 성장동력에도 먹구름이 꼈다.
핵심 인력 유출과 느슨해진 조직 문화도 위기설의 한 축을 차지한다. 삼성 반도체 특유의 토론문화가 사라지고 기술 경쟁력에서 뒤처지면서 드리운 패배주의는 ‘하삼하’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게 했다. SK하이닉스에서 삼성전자로 이직했다가 다시 SK하이닉스로 돌아가려는 직원을 일컫는 말로, ‘기술의 삼성’의 위상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다.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컨트롤타워 부재가 꼽히지만 사법리스크는 이 회장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이 회장은 2022년 회장 승진 당일 ‘부당합병·회계부정’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했고, 취임 1주년인 지난해에도 재판에 출석했다. 결국 2021년 1월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받아 취업제한으로 등기이사 복귀가 불발됐고, 지금도 4대 그룹(삼성·SK·현대차·LG) 총수 중 유일하게 미등기 임원으로 남았다.
삼성그룹을 비롯한 재계가 삼성 위기론에 대해 이 회장이 내놓을 메시지에 주목하지만 침묵은 길어지고 있다. 지난 24일 삼성전자 부회장단과의 만찬, 25일 삼성 현직 사장단과의 오찬에서도 공개 메시지는 없었다. 25일 이건희 선대회장 4주기로 추모 주간을 맞으면서 이 회장이 ‘승어부’(勝於父·아버지를 능가함)를 위해 어떤 비전을 구상 중인지 궁금증은 더욱 커지고 있다.
재계에선 이 회장이 메시지보단 위기 극복을 모색하고 실질적인 사업 결과를 도출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에 별도 메시지보단 11월 말 12월 초로 예상되는 연말 인사에서 대대적인 조직 개편으로 향후 경영 방향성과 위기 타개책을 내비칠 것이라는 분석이 이어진다.
재계 관계자는 “사법 리스크가 있다 해도 조직 전반에 만연한 보신주의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며 “대규모 투자 결정이나 미래 준비에 속도를 내고 과감한 인적 쇄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