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상징과 도상이 작품 속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작품을 가로지르는 문구는 영화 ‘대부’의 명대사 “가족 외의 사람에게 속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Never tell anybody outside the family what you are thinking again)”이다. 이를 기준으로 그림의 상·하단 하트 모양 안에 두 인물이 대칭해 자리한다. 그 사이로 ‘삶’(Life)과 ‘사랑’(Love)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그리고 여기저기 ‘평화’(Peace), ‘믿음’(Faith) 등이 흩어져 있어, 작가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들은 인생의 의미와 덕목을 표현하고, 작가 스스로 내면을 탐구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인물 주위로 배치된 칼은 누군가를 베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작가가 지키고 싶은 가치와 그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작품 ‘무제 6’은 작가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고찰하며 그려낸 개인만의 타로 카드로 볼 수 있다. 그림 속 상징들은 현재 자신을 비추면서 미래 방향을 찾고자 하는 작가 내면을 투영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배우가 쌀로 밥을 짓는 일이라면 화가는 그 찌꺼기로 술을 담그는 일 같다고 설명하면 어떨까. 같은 재료로 만드는 것이지만 그 방법에 따라 결과물은 전혀 다르게 나온다. 운동선수처럼 독하게 훈련하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로 영화를 찍는다. 그렇게 밥과 같은 연기가 만들어진다. 그러고 나면 몸과 마음에는 잔여물이 생긴다. 연기로는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가. 그것을 끄집어내어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술과 같은 그림이 만들어진다. 그림이 나를 회복시키고 다시 연기에 정진하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배우 겸 화가 하정우가 쓴 ‘작가노트: 이유에 대해’(2015) 일부분이다. 자신의 본분을 둘로 나누고 있다. 배우는 밥이며, 화가는 술이다. 밥과 술은 자아에 관한 메타포다. 그에게 자아는 광장(廣場)의 자아와 밀실(密室)의 자아로 나뉜다. 이 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영화예술과 회화예술이 모두 성공을 이룬다. 그런데 역설이 있다. 밀실이 개인적이고 닫혀 있는 공간이라면, 광장은 사회적이고 열려 있는 공간이다. 동시에 광장이 대중의 밀실이라면,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하정우는 영화로 대중을 밀실에 모으고, 회화라는 밀실로써 자기 자신을 광장에 풀어놓는다.
그는 페르시아 양탄자와 마스크에 관심을 갖는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절대자가 사람의 모습과 닮았다는 의인관(擬人觀)을 수용하지 않는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절대자를 모든 에너지인 동시에 모든 원리 그 자체라고 보았다. 절대자를 의인화해서 묘사하지 않은 근본 이유다. 단지 패턴으로 표현할 뿐이었다. 페르시안 카펫은 절대자의 에너지와 우주가 운영되는 원리에 대한 강렬한 확신을 표상한 예술이다.
페르시안 카펫의 형식적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철학적 사유는 하정우가 추구하는 세계와 부합한다. 하정우는 세계가 사랑의 에너지로 작동하며, 그 안에 사는 우리 역시 사랑의 시선으로 세계에 동참해야 한다고 믿는다.
작가는 수많은 자료를 조사해 페르시아 카펫의 패턴과 구조를 습득한 뒤 다시 내면화했다. 타로, 음악의 음률과 리듬이 추상화된 이미지, 기하학적 이미지, 전통 도안 등을 배합해 재구성했다. 하정우의 페르시아 카펫 연작에서 우리는 구성의 완전한 조화와 함께 필력을 살펴봐야 한다. 수많은 필획은 스타일이 다양하면서도 같은 범주의 필획은 하나의 구역에 모이는데, 구역에 모인 필획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균제(均齊·고르고 가지런함)를 이룬다. 더구나 필획의 속도가 몹시 빠르고 정확해 작가가 지닌 화력(畵歷)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풍부한지 가늠케 한다.
‘무제 6’에서 마주하는 두 얼굴은 내면에 자리하는 두 개의 페르소나를 상징한다. 하나는 배우(광장), 또 하나는 화가(밀실)이다. 권위를 뜻하는 명문가의 문장, 그리고 현대 축구 명가의 문장도 보인다. 상하 분단 구조의 그림은 작가가 지내온 삶의 무게를 전한다. 그런데 작가는 하부에 신념, 상부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적어넣었다. 세상은 선악·미추·길흉·빈부·귀천 등 음양과 명암이 동시에 작용한다.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도 있고 즐거움이 따르면 괴로움도 수반된다. 사람 사는 것이 그렇다. 그렇지만 작가는 끝나는 날까지 놓을 수 없는 가치를 신념과 사랑에 둔다.
하정우의 열네 번째 개인전이 11월16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에서 ‘Never tell anybody outside the family(네버 텔 애니바디 아웃사이드 더 패밀리)’라는 문패를 달고 관객과 만난다. 제목이 말해주듯 ‘나의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내 안에 있는 진정한 나와의 만남을 원한다’는 뜻이다. 올해 제작한 신작 35점을 내걸었다.
하정우는 일상 속 사물이나 인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간결한 선과 선명한 색채로 표현되어, 단순화된 형태가 두드러진다. 과장된 얼굴에 눈, 코, 입을 강조함으로써 인물에 원시적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순수한 정신과 원초적인 힘을 드러낸다.
카펫 문양에서 영감을 받은 신작들은 규칙적인 선과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토속적 문양을 활용해 인간 내면의 직관을 시각적으로 펼쳐 보인다. 현대 문명 속에서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삶의 진솔함과 생명력을 되살려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원시의 상징적 표현을 재해석하는 지점을 더듬으며,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울림을 전하고 새로운 정서적 발견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