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시즌 간 흥국생명의 화두 중 하나는 ‘배구여제’ 김연경의 대각에 서는 아웃사이드 히터 자리의 주인이 누가 되느냐였다. 지난 시즌 김연경의 아웃사이드 파트너는 아시아쿼터 외국인 선수였던 레이나 토코쿠(일본). FA 자격을 얻은 이주아가 IBK기업은행으로 이적하면서 아시아쿼터 자리는 황 루이레이(중국, 기량 미달로 V리그 개막 직전 뉴질랜드 출신의 아닐리스 피치로 교체)를 낙점한 상황. 이 때문에 김연경의 대각에 서는 선수는 토종 아웃사이드 히터 중 하나를 낙점해야 했다.
후보는 4명. 2018년부터 흥국생명에서 뛰고 있는 김미연과 FA로 영입한 최은지, 6년차 김다은과 4년차 정윤주였다. 마르첼로 아본단자 감독의 낙점을 받은 것은 의외로 가장 경력이 짧은 정윤주였다. 입단 첫해인 2021~2022시즌엔 김연경이 다시 중국리그로 떠나고,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의 부재로 일정 이상의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지난 두 시즌 간은 원 포인트 서버로 나섰다. 176cm의 작은 신장이지만, 탄력이 좋아 공격력은 일품이었지만 리시브 능력이 아쉬워서 주전으로 발탁되지 못한 케이스였다.
아본단자 감독은 정윤주의 공격력에 주목해 비시즌 동안 연습기간에도 정윤주를 꾸준히 주전으로 기용했고, V리그가 시작해서도 리시브가 흔들리더라도 여간해서는 주전에서 빼지 않고 있다.
아본단자 감독의 ‘정윤주 밀어주기’는 대성공을 거두는 모양새다. 정윤주는 24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2024~2025 V리그 여자부 2라운드 현대건설과의 맞대결에서 개인 통산 최다인 21점(공격 성공률 36.54%)을 몰아치며 흥국생명의 세트 스코어 3-1(25-17 35-37 27-25 25-12) 승리를 이끌었다.
이날 승리로 승점 3을 챙긴 흥국생명은 승점 26(9승)으로 승점 21(7승3패)의 현대건설과의 격차를 벌렸다. 한 경기 덜 치렀음을 감안하면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 있다. 이날 승리로 흥국생명은 시즌 초반 독주할 수 있는 제반환경을 만들어냈다.
이날 정윤주는 서브와 리시브로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먼저 끝없는 듀스 승부가 펼쳐진 2세트. 35-36으로 세트 포인트를 내준 상황에서 현대건설 위파위(태국)의 서브가 정윤주에게 향했고, 정윤주는 이를 피했다. 그러나 공은 코트 안쪽에 정확히 떨어졌다. 정윤주의 리시브 미숙 하나로 세트를 내준 것이다.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지만, 마음을 다 잡은 정윤주는 3세트 듀스 상황은 승리의 주역이 됐다. 3세트도 치열한 초접전이 펼쳐져 또 다시 듀스에 돌입한 상황. 24-25에서 정윤주는 전위 오픈 공격을 성공시켜 동점을 만든 뒤 후위로 내려가 강서브를 날렸다. 정윤주의 서브는 국가대표 리베로인 김연견도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들어가며 서브 득점이 됐다. 이후 김연경의 퀵오픈으로 3세트를 흥국생명이 가져오면서 승부의 추는 급격히 기울었다.
아본단자 감독도 정윤주의 시즌 초반 활약해 흡족해했다. 그는 “(정)윤주는 많이 성장해야 하는 선수다. 경기를 뛰며 더욱 성장했으면 한다”면서 “리시브나 수비에선 부족하지만 성장하고 있다. 훈련과 연습을 통해 더 향상시켜야 할 부분이다. 오늘도 경기 중에 수비가 향상되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정윤주는 경기 뒤 수훈선수로 인터뷰실에 들어섰다. 데뷔 후 단독 수훈선수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부끄러운 듯 웃어보인 정윤주. “100% 만족하고 최고였다고 말할 순 없지만, 중요한 역할을 잘 수행해낸 것 같아 기쁘다. 신인 때 20점을 올렸을 때보다는 한층 더 성장한 것 같다. 더 성장하겠다”
2세트 결정적인 서브득점을 헌납한 상황에 대해 물었다. 정윤주는 “리시브가 약점이라 언니들이 많이 커버해준다. 처음 서브를 봤을 땐 휘어서 들어올 것이라 생각해 (김)연경 언니를 불렀는데, 저한테 날아오는 서브여서 미처 받지 못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3세트 서브득점으로 만회한 것 같아 다행이다. 3세트 서브득점이 들어갔을 때 ‘와, 해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덧붙였다.
흥국생명에는 투트쿠와 김연경이 주공격수지만, 전위에 올라가면 정윤주도 공격을 해내야 한다. 올 시즌 김연경의 파이프(중앙 후위공격) 빈도가 늘었지만, 후위에선 주로 수비에 치중한다. 이단 연결 상황에선 정윤주가 일정 이상의 역할을 해줘야만 경기가 원활하게 풀리는 흥국생명이다. 정윤주는 “아본단자 감독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 받고 들어가서 때릴 때 블로킹 당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공격을 할 때도 다양한 코스와 타법 등으로 내용을 담아서 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정윤주의 성장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성장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매경기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떨어졌다가 올라가기도 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라면서 “원포인트 서버로 뛸 때는 서브 하나에 모든 걸 담아야 해서 조금 더 무거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저를 ‘믿어주고 있구나’라는 신뢰감이 있어서 실패했을 땐 ‘다음엔 이걸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 점점 더 멘탈적으로 강해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주전으로 뛰면서 팬들이 늘어난 것도 실감하고 있는 정윤주다. 그는 “경기 끝나고 작년이나 재작년에 비해 제 이름을 불러주시는 팬들도 많아졌다. 기쁘다”라고 말했다.
정윤주는 그간 올스타전에서 서브퀸 콘테스트에 출전했지만, 올스타 신분이 아니어서 올스타전 유니폼이 아닌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고 참가해야 했다. 정윤주는 생애 첫 올스타 선정에 대한 욕심도 숨기지 않았다. “올 시즌엔 올스타전 유니폼을 입고 언니들과 경기를 뛰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