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빼앗긴 땅을 제외한 국토에 한정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하는 방안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혀 주목된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뒤 현재 그 영토의 약 18%를 점령하고 있다.
29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최근 영국 뉴스 채널 ‘스카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키이우 정부가 통제하는 영역부터 먼저 나토의 보호 아래 둬야 전쟁의 확대를 막을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키이우 정부가 통제하는 영역’이란 개전 후 러시아에 빼앗긴 땅을 뺀 우크라이나 국토를 뜻한다.
만약 이 방안이 성사된다면 러시아는 나토와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포기하거나 최소화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나거나 소강 상태로 접어들면 우크라이나 정부는 피점령지 반환을 놓고서 러시아 정부와 외교적 협상을 벌이겠다는 것이 젤렌스키의 구상이다.
나토 헌장 5조는 집단안보와 관련해 ‘하나의 회원국이라도 공격을 당하면 다른 모든 회원국은 방어에 동참할 의무가 있다’는 취지로 규정하고 있다. 나토가 러시아와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하면서도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일원이 되는 경우 32개 회원국 전부가 동맹의 의무에 따라 러시아와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젤렌스키의 말대로 러시아 피점령지를 제외한 국토에 한정해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이 된다면 나토 헌장 5조에 따른 동맹의 의무는 발생하지 않는다. 미국이 이끄는 나토와 러시아 간의 전면전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러시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32개 나토 회원국 전체와 군사적 대결을 하는 상황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결국 러시아는 전쟁 중단을 결심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다. 하지만 러시아가 전혀 개의치 않고 무력 행사를 계속할 개연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러시아는 앞서 전쟁 종결의 조건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를 내세웠다. 영토의 전부냐, 일부냐를 떠나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이 되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러시아의 확고한 입장이다.
따라서 이 방안은 실현 가능성이 극히 낮아 보인다. 러시아처럼 무력으로 다른 주권 국가의 영토를 빼앗는 행위가 정당화되는 나쁜 선례로 남을 수도 있다. 나토는 아직 우크라이나에 이런 제안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그간 나토 관계자들 사이에선 이런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며 동시에 우크라이나 안보도 보장하자는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제기됐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전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 4월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와의 인터뷰에서 동·서독 분단 시절 서독의 사례를 들었다. 서독은 동독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서독 법체계상 동독은 서독 영토에 해당했다. 그런 상태에서 1955년 서독은 나토에 가입했다. 스톨텐베르그 전 사무총장은 “서독은 늘 통일 독일을 지향했으나 (서독의 실효적 지배에서 벗어난) 동독 지역은 나토 집단안보 조항의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고 FP에 설명했다.
나토는 아니지만 동맹인 미·일 간 상호방위조약도 그렇다. 스톨텐베르크 전 사무총장은 FP에 “미국은 러시아가 지배하는 쿠릴 열도를 제외한 일본 영토에 대해서만 안전 보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쿠릴 열도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며 소련(현 러시아)에 영유권이 넘어갔다. 일본은 이 섬들을 ‘북방 영토’라고 부르며 러시아로부터 반환받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의 말은 미·일 동맹에 따른 상호 방위의 의무는 쿠릴 열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앞서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 전 나토 사무총장도 ‘우크라이나를 나토 회원국으로 가입시키되 나토 조약의 적용 범위를 현재 우크라이나가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으로 한정시키자’는 취지의 주장을 편 바 있다. 2022년 2월 개전 후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는 나토의 보장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