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내 ‘자체 핵무장론’이 부상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첫 날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지칭하고,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직접 대화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북핵 용인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탓이다.

현재의 한·미 동맹과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감안할 때 자체 핵 개발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북·미 대화와 핵 담판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자체 핵무장론이 대미 협상용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견해에는 전문가들도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그러나 50년전 핵무기 자체 개발을 실제로 시도한 바 있다. 국제사회와 미국의 압박에 결국 포기했지만, 최근의 불안한 한반도 안보 상황과 맞물려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향수가 짙어지고 있다.
◆50년전 핵개발 흔적을 찾아···1972년 첫 보고에서 1975년 재처리시설 설계도까지
박 대통령은 1970년대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에 반발해 자주국방 모색 차원에서 추진됐다. 미 정부와 갈등이 이어졌고, 미 정부 압박에 공식 중단을 밝혔지만, 그 이후로도 비밀리에 추진했다. 그러나 최종 핵무기 개발에는 결국 실패했다.

세계일보는 2004년 8월 2일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의 핵심인 핵연료 재처리 시설 설계도와 설계도면을 최초 입수해 보도했다. 취재팀이 입수한 자료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프랑스 생고뱅사에 의뢰해 1974년 10월 1일자로 작성한 200쪽 분량 주개념설계서와 100쪽 분량 부속설계서 2권 그리고 1975년 1월 10일자로 작성된 100여쪽 분량의 재처리 시설 관련 기본설계도면이다.
1970년대 중반 원자력연구소에서 핵연료 재처리 사업담당 실무책임자였던 김철 아주대 명예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재처리 시설 개념설계서와 기본설계도면이었다. 이 설계도는 박 대통령 시절 핵무기 개발이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는지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설계 자료였던 까닭에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한국 핵개발 최초 흔적은 1972년 9월 8일 오원철 청와대 경제수석이 박 대통령에게 ‘원자 핵무기 개발 계획’이라는 A4용지 9쪽 분량 비밀보고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목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투하된 것과 같은 20kg 플루토늄탄 개발이다. 1972년 첫 보고에서핵무기 개발을 시작해 1975년 재처리 시설 관련 기본설계도면까지 한국 정부는 핵개발을 추진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한미군 철수계획에 반발···공식포기 이후에도 비밀리 재추진
직접적인 계기는 주한미군 철수 계획에 자극을 받아서다.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등 미국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지만 주한미군 철수가 현실화하면서 심한 배신감과 함께 자주국방이 절실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박 대통령은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을 받고,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했다.
그러나 1970년 7월 윌리엄 로저스 미 국무장관은 베트남 사이공(호치민)에서 열린 베트남 참전국 회의에서 최규하 외무장관에게 주한미군 2만명 철수를 통고했다. 한 달뒤 닉슨 대통령 특사로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방한했다. 처음에는 ‘2만명 이상 철군은 없을 것’이라는 상호 합의 하에 원만하게 협상이 진행됐지만, “향후 5년 이내 주한미군 완전 철수”라는 애그뉴 부통령의 언급이 알려지면서 한국 정부는 핵 개발을 본격 추진을 결심했다.
핵 개발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국방과학연구소(ADD)가 핵 폭탄과 핵폭탄 투발수단인 미사일 개발을 맡고, 핵폭탄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연구용 원자로와 핵연료 재처리 시설은 원자력 연구소 특수사업부에서 담당했다.

정부는 1973년 4월 캐나다 정부와 비밀리에 접촉해 캔두형 원자로 도입 작업에 착수했다. 상대적으로 경수로형 원자로 보다는 중수로형 원자로가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하다. 캔두형 원자로는 중수로다. 이와 함께 순도 높은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한 3만kW짜리 연구용 원자로(NRX)도 도입을 시도했다.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하자 미국의 압박도 강화됐다. 한·미 관계는 갈등으로 치솟았다. 미국은 안보지원 중단을 경고하고, 핵 개발을 시도할 경우 주한미군 완전 철수를 경고하며 압박 강도를 높였다. 특히 인도의 1974년 핵무기 실험이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 정부의 경계심을 끌어올리는 데 큰 계기가 됐다. 미국의 계속되는 압박에 1975년 핵개발 포기를 공식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그러나 1976년 재처리 기술 및 시설 도입 사업을 ‘화학처리 대체사업’이라고 명칭을 바꿔 기술 도입을 계속 추진했다. 연구용 원자로를 자체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핵무기 투발수단인 미사일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1978년 9월 사거리 180km의 백곰 시험 발사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 사건과 뒤이어 일어난 12.12 쿠데타로 핵무기 프로젝트는 중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