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경제가 안 좋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우리나라 기업을 대표하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에서 휘둘리고 있고 주식시장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란 자조적인 말이 이제 상식이 되었다.
우리 기업은 남이 먼저 한 것을 곧잘 따라는 하는데, 전에 없던 혁신적인 상품을 내놓았던 적이 거의 없다. 이른바 ‘퍼스트 무버’가 못 된다는 소리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부터 최근의 전기자동차,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우리 기업은 모두 남들이 먼저 ‘발명한’ 것을 재빠르게 따라잡는 ‘패스트 팔로어’에 머물고 있다. 남이 먼저 한 것을 쫓아가자니 숨이 차다. 특허권을 사용하기 위해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고 자칫 지식재산권 소송에 휘말리기 일쑤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한국은 1988년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처음 출전한 이래 수학을 비롯한 과학 9개 분야 국제올림피아드에 출전해 올해까지 국가 종합 1위를 45차례나 차지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고등학교까지는 잘하다가 대학에 가고 난 이후 고꾸라지고 만다.
심리학과 건축학 연구에 의하면, 공간의 물리적 환경이 인간의 사고방식과 창의력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1966년 그의 저서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인간이 건축 공간에서 느끼는 다양한 심리적 기제를 분석했다. 그는 이 책에서 건축 공간의 규모가 사람의 감정, 사회적 상호 작용 그리고 인지 과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규명했다.
이에 앞서, 1943년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된 하원 의사당 재건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건물을 만듭니다. 그다음은 건물이 우리를 만듭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처칠은 하원 의사당의 디자인을, 통로를 중심으로 여야가 마주 보는 벤치만 놓인 작은 장방형의 폭격 전 모습 그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친밀하고 대립적인 성격의 작고 길쭉한 방이 의회민주주의에 필수적인 활발한 토론과 직접적인 책임감을 유도한다고 믿었다. 처칠은 공간의 형태가 하원의 정치 문화와 행태를 만들면서 그 속에서 일어나는 토론과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2007년, 미국의 마케팅 및 심리학자 조앤 마이어스레비와 중국의 마케팅학자 주루이는 공동 연구를 통해 건축 공간에서 ‘천장 높이’와 ‘창의성’의 상호 관련성을 자세하게 밝혔다. 건축에서 ‘천장 높이’는 바닥 마감부터 천장 마감까지의 높이를 일컫는데, 이는 실내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순수한 공간의 높이다. 이 연구에 의하면, 높은 천장 높이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확장된 자유’를 느끼게 함으로써 추상적이고 창의적인 사고와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반면, 낮은 천장 높이는 제한된 공간감을 줌으로써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이 세부적인 분석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을 하는 데 적합하다. 이들은 높은 천장 높이가 창의력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설명하면서 이를 ‘대성당 효과(Cathedral Effect)’라고 불렀다. 대성당은 신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중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천장을 높게 조성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없었던 혁신적인 제품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는 창의성이 요구된다. 번뜩이는 호기심과 끝도 없는 상상력이 창의력의 원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의 건축 환경이 행여 한국인의 창의성을 저해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주거 문화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아파트’ 혹은 ‘빌라’라고 불리는 공동주택에 살고 있다. 그런데 공동주택의 천장 높이는 2.3m가 일반적이다. 마감하기 전 골조의 층고는 2.8m에 이르지만, 천장 속에는 각종 배관이 지나가야 하는 공간이 필요하기에 천장 높이는 2.3m로 낮아지고 만다. 천장 높이가 높으면 개방감이 증대되어 쾌적한 느낌을 주지만, 건설업자는 층고를 최대한 낮추어야 분양할 수 있는 층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가급적 낮추고 싶어 한다. 고급 아파트도 예외가 아니다. 건축적인 측면에서, 한국인들은 낮은 천장 높이를 가진 집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창의력을 계발할 기회가 그만큼 적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실내 공간이 이렇게 제한적이라면 무한히 높은 공간감을 주는 바깥으로 나가면 되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수많은 과학자, 예술가, 작가들이 지적 작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산책을 즐겼다.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하루의 대부분을 작곡에 몰두했지만, 매일 산책하는 시간을 빠트리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숲은 베토벤이 즐겨 찾는 산책로였다. 그는 산책 도중 멜로디와 리듬이 떠오르면 항상 가지고 다니던 작은 노트에 그 아이디어를 적었고, 이는 베토벤의 창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의 1888년 저서 ‘우상의 황혼’에서 “모든 위대한 사상은 걷는 동안 태어났다”고 썼다. 니체에게 산책은 단순한 신체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적 사유와 창의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역시 산책에 열심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책에 열중했는데, 산책은 그에게 직관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자극하는 비법이었다.
몇 년 전부터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둘레길’이라 이름한 산책로가 거미줄처럼 생겼다. 천장 높이가 낮은 집에 사는 우리의 주거 환경을 당장 바꿀 수는 없으니, 산책로가 한국인의 창의성을 높이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학교와 도서관과 같은 공공시설을 지을 때 조금 비싸더라도 천장 높이가 높은 건축물을 많이 세웠으면 좋겠다. 이제 우리도 창의성을 발휘해 ‘퍼스트 무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