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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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가 웬 책방이요? ‘자기만의 방’ 필요했죠” [차 한잔 나누며]

기사입력 2025-03-10 06:00:00
기사수정 2025-03-09 21: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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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북웜’ 대표

두 자녀 양육·이웃과 교류 위해
美 명문 로스쿨 나오고도 새 길
1년도 안 돼 서래마을의 명소돼
책 판매 넘어 지역 공동체 역할
“정말 재밌어… 강의도 계획 중”

“교사였던 할머니, 변호사였던 어머니의 삶에서 완벽한 ‘일·가정 양립’은 불가능했어요. 2025년의 저도 크게 다르지 않네요.”

8일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다국어 책방 ‘북웜(bookworm)’을 운영하고 있는 김나영 대표를 만났다. 책을 사랑하는 이가 책방을 여는 것에 특별할 것은 없지만, 그가 미국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미시간대 로스쿨 출신 변호사라면 얘기가 다르다. 논문을 완료하면 곧 형사법 박사 학위도 추가된다. 김 대표는 다른 동기들처럼 국내 유명 로펌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냐는 말을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단호했다. 4살, 6살인 두 자녀의 주 양육자로 곁에 있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서초구의 동네책방 ‘북웜’을 운영하는 김나영 변호사가 7일 책방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책방이 있는 곳은 아이들이 다니는 외국인 학교에서 2∼3분이면 닿을 거리다. 회사 소속이 아닌 자영업자라 급할 때 아이들에게 달려갈 수 있다. 법률 관련 프리랜서 업무를 유연하게 보면서 좋아하는 책으로 이웃과 교류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만들고 싶기도 했다. 조그맣게라도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무인 꽃집 자리를 인수해 2024년 6월 초소형 책방을 열었다.

아무 기대 없이 벌인 일인데, 북웜은 1년도 안 돼 서래마을의 작은 명소가 됐다. 책벌레였던 자신이 가진 많은 책, 주재원 생활 등을 하고 떠나는 이들에게 기증받은 외국어책을 대형서점 대비 저렴한 가격에 파는 것이 주요 경쟁력이다. 아이들이 오면 김 대표가 영어로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교육열 높은 지역 학부모들에게 단숨에 눈도장을 찍었다. 입소문을 탄 끝에 지난달 말에는 전성수 서초구청장이 방문해 인증샷을 남기고 갔다.

이날 인터뷰 도중에도 책을 보러 오는 이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 김 대표는 “외국인과 한국인 이웃 모두의 공동 육아방이자 사랑방이 됐다”며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지 상상도 못했는데, 너무 재미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자리를 비울 땐 다른 학부모가 책방을 봐주기도 하고, 언어 교환이나 취미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공간을 무료 대여해주기도 한다. 단순 책 판매를 넘어 지역 공동체로 커가는 이곳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자신의 책을 보내는 이도 늘고 있다. 은퇴하면서 그동안 읽은 수백 권의 책을 흔쾌히 내준 교수님부터 1∼2권씩 안 읽는 책을 놓고 가는 많은 이웃이 있기에 1000∼5000원 사이의 특가 판매가 가능하다고 한다.

김 대표는 “책방을 막상 해 보니 너무 적성에 맞아서 본격적으로 뛰어들까 싶다”고 말했다. 이는 법률가나 책방 주인 같은 직업 차원을 뛰어넘는 그의 ‘꿈’과 관련이 있다. 김 대표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법률 지식을 나누고, 배움에 열망이 있는 대중에게 강의를 정말 하고 싶었다”며 “박사 학위를 병행한 것에는 그런 이유가 컸는데, 책방에서도 가능한 일이더라”라고 했다.

책을 매개로 한 다양한 모임을 통해 그의 꿈은 현실이 되고 있다. ‘박완서를 사랑하는 엄마들의 모임’(완사모),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글을 읽고 근처 한강을 함께 걷는 ‘한강 읽고 걷기’(Talk Han Kang, Walk Han Kang) 모임 등이 대표적이다. 이날 영어로 진행된 한강 모임엔 평소보다 많은 16명이 모여 12·3 비상계엄 사태, 각국의 민주주의 위기, 여성인권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