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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이 ‘배구여제’라 불리는 이유? 결정적인 디그 2개로 증명했다...“정상에 있을 때 은퇴, 내가 원하던 마지막 모습이다”

기사입력 2025-04-09 10:38:04
기사수정 2025-04-09 10: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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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의 ‘배구여제’ 김연경이 세계 최고의 아웃사이드 히터로 불리는 이유는 빼어난 공격력 때문만은 아니다. 전 세계에 김연경 만큼 타점 높은 공격력을 보유한 선수들은 꽤 많다. 그가 배구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이유는 1m92의 장신에도 불구하고 리베로 수준의 수비력을 보유한 덕분이다. 고교 시절 초반만 해도 신장이 작아서 리베로와 세터 포지션을 맡아야 했던 김연경은 2년 사이에 급격히 신장이 컸다. 장신 선수가 되면서 공격수로 포지션을 옮겼지만, 단신 시절 리베로와 세터를 소화하며 닦은 리시브나 디그 등의 기본기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공격과 수비가 모두 출중한 ‘완전체’로 거듭날 수 있었다.

 

지난 8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흥국생명과 정관장의 2024~2025 V리그 챔피언결정전 5차전은 김연경의 공수겸장으로서의 진가가 제대로 드러난 경기였다. 세트 스코어 2-2로 맞선 5세트, 흥국생명이 13-12로 앞선 박빙 상황. 김연경이 서브를 넣기 위해 후위로 빠졌다. 이번 챔프전 내내 흥국생명의 가장 큰 고민은 김연경이 후위일 때 팀 전체적인 공격생산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 점 차로 앞서있지만, 향후 승부는 흥국생명이 더 불리해보였다.

 

그러나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김연경은 후위에서도 수비로 팀을 살릴 수 있는 선수라는 점이었다. 김연경은 메가(인도네시아)의 오픈 공격을 몸을 날려 공을 걷어 올렸고, 이를 투트쿠(튀르키예)가 퀵오픈 득점으로 연결시켰다. 이어진 14-13에서도 비슷했다. 부키리치(세르비아)의 후위 공격을 김연경이 또 한 번 가볍게 받아 올렸고, 이 공은 다시 한 번 투트쿠의 퀵오픈으로 연결됐다. 투트쿠의 손을 떠난 공을 정관장 정수지가 손을 갖다대봤지만, 그 공은 코트 뒤로 멀찍이 벗어났다. 흥국생명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김연경은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공격이 아닌 디그 2개로 팀을 우승시키며 자신이 왜 세계 최고의 아웃사이드 히터로 불리는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챔피언결정전 5경기에서 133점을 몰아친 김연경은 기자단 투표 31표를 모두 쓸어담으며 만장일치로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에 등극했다. 2018∼2019시즌 챔피언결정전 이재영(당시 흥국생명)에 이은 역대 두 번째 만장일치 MVP다. 데뷔 시즌에도 흥국생명의 통합우승을 이끌며 정규리그 MVP와 챔피언결정전 MVP를 쓸어담았던 김연경은 현역 은퇴 시즌에도 통합우승과 챔피언결정전 MVP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한국 배구가 배출한 세계 최고의 선수에 어울리는 마무리였다.

 

시상식 뒤 만난 김연경은 의외로 차분해보였다. 2차전을 마쳤을 때만 해도 “우승을 하면 펑펑 울 것 같다”고 말하던 그였지만,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하면서 후련한 감정이 더 컸단다. 김연경은 “주변에서 아직 더 뛸 수 있는데 왜 은퇴하냐고 아쉬워하시는 분도 있지만, 나는 정상에 있을 때 은퇴하고 싶었다”라며 “V리그로 돌아온 뒤 계속 준우승만 해 안타까웠는데, 이렇게 별을 하나 추가할 수 있어 다행이다. 이게 내가 정말 원하던 은퇴 순간의 모습이었다”라고 말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해외리그로 진출해 오랜 기간 뛴 김연경이 V리그에서 소화한 시즌은 딱 8시즌이다. 다만 김연경이 대단한 것은 그 8시즌 동안 한날한시도 최고가 아닌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흥국생명은 그가 뛴 8시즌 모두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고, 이번 시즌을 포함해 2005~2006, 2006~2007, 2008~2009시즌까지 네 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선수생활의 황혼기에 다시 돌아온 V리그 코트에서는 쓴 잔을 많이 마셨다. 2020~2021시즌을 비롯해 2022~2023, 2023~2024시즌엔 모두 챔피언결정전 우승 문턱에서 좌절해야 했다.

 

이번 챔프전도 쉽지 않았다. 인천 홈에서 1,2차전을 잡으며 다시는 인천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대전 원정에서 모두 풀세트 접전 끝에 패했다. 결국 다시 돌아온 인천에서도 풀 세트 접전을 치른 끝에야 우승의 달콤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김연경은 “별 하나를 추가하는 게 정말 어렵더라. 3, 4차전이 끝난 뒤에는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오나’라고 한탄하기도 했다”며 “드라마, 영화 시나리오도 이렇게 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김연경은 코트에 서지 않는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김연경이다. 그는 “내일 대전에 가거나, 인천에서 경기해야 할것 같다. 실감 나지 않는다"며 "며칠이 지나야 내가 은퇴했다는 걸 실감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간 인터뷰를 통해 국가대표 감독 등 지도자에 대한 꿈을 내비쳤던 김연경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진로를 확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선 ‘김연경 재단’에서 많은 활동을 할 계획이다. 그 이후의 진로는 쉬면서 차분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전했다.


인천=남정훈 기자 ch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