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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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

기사입력 2025-04-10 23:43:30
기사수정 2025-04-10 23:4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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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로 하루아침 삶의 터전 잃어
평범한 일상 깨지니 가치 깨달아
다시 예쁜 집을 지을 수 있을까…
그곳서 밥 짓는 냄새를 풍겨야지

“작가는 불꽃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뒤에도 뭔가를 쓰는 사람이다”라는 정의를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여기서 ‘불꽃’은 내면의 불, 예술적인 감수성, 재능의 은유적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불꽃이나 잿더미, 그을음, 폐허 같은 단어를 비유로도 쓸 수 없을 것 같다. 불이 지나간 자리를 암시하는 말도 입술에 올리기조차 너무 무섭다. 3월 25일 밤 이후 나는 작가가 아니었다. 평균인의 삶을 살지 못했다. 방금 도시락 먹고 두통약도 먹었으니, 이제 뭐라도 써야 하는데 망연자실 어처구니없고 미치겠다. 마감하기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가져온다. 1행부터 지나치게 낯설다. 마치 ‘무화과나무 숲’으로 들어갔던 ‘그 사람’처럼 이 글에 나는 나오고 싶지 않다.

쌀을 씻다가/창밖을 봤다//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옛날 일이다//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아침에는/아침을 먹고//밤에는 눈을 감았다/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황인찬 ‘무화과나무 숲’)

김이듬 시인·서울대학교 강사

이곳 이재민 임시거처에선 “쌀을 씻다가 창밖을” 볼 일이 없다. 밥 짓는 냄새 안 난다. 매 끼니 도시락이 나온다. 소화불량이니까 저녁에는 굶는 게 낫겠다.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깨져야 일상의 가치를 깨닫다니! 밤에 눈을 감아도 잠 안 온다. 수면유도제를 먹어도 뒤척거린다. 친구들 모두 광장으로 나가는데, 너는 여기서 뭐 하느냐는 자책이 들려온다. 실제로는 아무도 나를 혼내지 않는데 스스로 다그치거나 학대하지 말기로 다짐할 때마저 누군가 나를 비웃고 괴롭히는 것 같다. 우울증, 피해망상증상을 앓는다. 나도 심리상담이 필요하다. 우리 마을 중턱에 살며 소라랑 문어 등을 잡아 파는 언니도 집이 전소되었는데, 보건소에서 나온 심리상담사를 만나고 나서 한결 나아졌다고 했다.

이제 어떻게 사냐며 울던 주민들도, 산목숨은 살아야 한다던 주민들도 급속도로 지쳐가고 있다. 나는 서울로 출강하느라 집을 비우는 날이 더 많았다. 영덕에선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강의 마치고 영덕 석리까지 오는 데는 차를 네다섯 번 갈아타야 하고 교통비도 만만찮다. 문학 행사가 있는 날엔 막차가 끊기기 일쑤여서 숱하게 수도권의 친척 집 신세를 지곤 한다.

오늘 오후 3시, 여기서 마을회의를 했다. 이장님이 나서서 말했다. 그는 헌신적으로 일해 주민들의 신뢰가 두텁다. 꼬불꼬불 한 사람 겨우 오르내릴 수 있는 길만 있으니, 차량용 길을 만들어야 마을을 복구할 수 있다고. 그러려면 모든 주민이 땅을 조금씩 기부해야 한다고.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군에서 지원금 한 푼 안 주는데, 그거부터 물어보는 분도 계셨다. 회의가 끝날 때쯤 윗집 할아버지의 사남매가 앞으로 나와 용기 잃지 마시라고 하며 기부금을 냈다. 객지에서 달려온 그들은 사랑하는 고향이 사라지지 않기를 소망한다며 눈물 보였다. 여기저기 흐느끼는 소리가 커졌다.

이심전심은 능력일까? 사람이 타인의 고통, 죽음, 재난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온전히 공명한다면 그 사람은 넘치는 연민과 슬픔 속에서 이미 죽었을 것이다. 공감력과 감수성의 한계는 인간의 생존조건 같다.

“나도 30대에 한강이 넘쳐 지붕까지 물이 차서 구로초등학교에서 일주일을 산 적이 있어요. 집에 들어오니 다 떠내려가고 그때의 참혹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래도 또 살아지더라고요. 암튼 우선은 건강부터 챙겨요. 기도할게요” 인천에 사시는 선배 시인께서 문자를 보내오셨다. 누구보다 고독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후배 시인이 카카오페이로 돈을 보내왔다. 나는 거절했다. “돈을 안 받는다고 하시니…… 영덕 산불 기부금을 보내겠어요.”라고 했다.

다시 의욕을 가져야지. 서서히 펜도 잡고 삽질도 해야지. 다시 예쁜 집을 짓겠다. 지을 수 있을까? 함께 아파해준 분들을 그 집에 초대하여 자유롭게 같이 살자고 해야지. 그 집에선 이전의 자신과 조금 달라져서 나오게 되겠지. 쌀을 씻다가 수평선을 봐야지. 밥 짓는 냄새를 풍겨야지.

 

김이듬 시인·서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