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법재판관 문형배의 전 재산은 약 4억원이다. 고위공직자 전체 평균과 비교해도 적은 액수지만, 헌법재판관이라는 자리를 고려하면 더욱 이례적이다. 통상 헌법재판관들의 평균 재산은 20억원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과거 인사청문회에서 “일반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법복을 입었어도 시민들 곁에 머무르겠다는 다짐이었다.
문 재판관의 이런 행보는 요즘 고위공직자들의 자산 관리 방식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최근 공개된 고위공직자 재산 내역에 따르면, 최상목 경제부총리, 오세훈 서울시장, 심우정 검찰총장 등은 미국 국채나 주식 등 달러 기반 해외 자산에 대거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산 다변화’라는 설명이 붙지만, 단순한 투자 이상의 해석이 가능하다.
특히 최상목 부총리는 미국 국채를 집중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환율과 외환정책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경제수장이, 자국 통화보다 달러 자산에 무게를 실었다는 점은 상징적으로 읽힌다. 외환위기 가능성을 사전에 염두에 둔 일종의 ‘헤지(hedge)’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실제로 한국 경제에 위기가 닥칠 것이라 판단했는지 여부 보단 그가 취한 자산 포지션이 ‘한국 경제의 불안’에서 개인적 이익을 얻는 구조라는 점에 눈길이 간다.
이쯤 되면 “위기의 기미를 가장 먼저 감지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고위공직자가, 그 정보를 바탕으로 자산을 운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거나 “정보가 모두 공개돼 있다 해도, 시민들이 동일한 조건에서 같은 판단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지적이 나온다.
시간, 분석력, 자산 여유, 실무 감각, 그리고 인맥까지 갖춘 고위공직자와, 하루하루 생계를 책임지는 보통 시민이 같은 출발선에 서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에 가깝다.
반론도 있다. 기획재정부는 “최 부총리의 미국 국채 보유는 최근에 새로 매입한 것이 아니라, 2018년 이후 계속 보유해오던 달러 자산이 미국 국채로 바뀐 것”이라고 해명했다. 신규 매입이 아니라 자산 구성의 변화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국민 입장에서 보자면, 이 사안이 불편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행위의 시점’이나 ‘투자 구조’ 그 자체보다, 그들이 누구냐는 점에 있다. 최 부총리는 대한민국 경제의 방향을 제시하고 정책을 만드는 자리에 있다. 누구보다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그런 판단이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공직자의 투자 행위는 언제나 엄격한 시선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은 공직자가 직무상 취득한 정보를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해충돌방지법도 직무 관련 경제적 이해가 충돌할 경우 회피하거나 신고할 의무를 부과한다. 직접적인 법 위반은 아니더라도, 경제 주무부처 수장의 해외 자산 운용은 직무 관련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시점에서 문 재판관의 4억원은 단순한 재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의 자산은 소박하지만, 그 안에는 공직자의 자세가 담겨 있다. 국민 위에 서려 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 머물겠다는 태도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리더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까? 국가를 하나의 투자판처럼 여기고, 위기를 기회 삼아 빠져나갈 준비를 마친 이들인가? 아니면 불안의 한가운데에서도 끝까지 공동체 안에서 책임을 다하려는 이들인가?
조기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의 유력 인사들이 속속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그들이 가진 재산의 규모가 아니라, 그 재산을 통해 보여준 철학과 태도, 그리고 공적 권한 앞에서 어떤 균형감각을 지녔는지를 살펴야 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필요한 리더는 정보와 권력을 ‘이익’이 아닌 ‘공익’으로 돌릴 수 있는 사람,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어려운 자리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