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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의시대정신] 시대가 빌런이었다

기사입력 2025-05-05 23:14:56
기사수정 2025-05-05 23: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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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궁핍·가부장제 사회서
시대와 싸워 이겨낸 관식·애순
현재는 디지털 벽 앞서 괴로워
노년층 배려할 정책 구현 절실

열아홉, 열여덟 소년 소녀가 야반도주 끝에 잡혀왔다. 소년은 학교에서 정학을 맞았고, 소녀는 퇴학을 당했다. 같이 가출했는데 왜 처분이 다르냐는 소년의 울분에 소녀의 할머니가 가슴을 친다. “그걸 몰라서 물어? 둘이 똑같이 붙어 놀아도 사내 치기는 호걸 짓이고, 지집애 순정은 화냥질이라는 걸.”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이 쇼츠 영상으로 퍼지자 이런 댓글이 달렸다. “그땐 그랬지. 시대가 빌런이었지.”

악당을 찾기 힘든 드라마다. 유일한 악역이라 할 만한 학씨 아저씨, 부상길조차 배우의 호연과 끝내 미워하기 힘든 인간적인 면모로 인기 캐릭터가 됐다. 드라마가 겨누는 건 인물 간의 갈등이 아니라 그들을 짓눌렀던 시대의 공기다. 물심양면 뒷받침할 집안이 없다면 급장 자리도 양보해야 했던 시절, 지집애 공부시켜 뭐 하냐던 시절, 어촌계장이고 대통령이고 다 해 먹겠다던 애순이가 “그냥 내 팔자가 식모인가 봐요”라며 꺾이던 시절, 악당이 있다면 그들이 감내해야만 했던 그 시대였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애순과 관식이 굽이굽이 겪은 고난은 단지 개인의 서사가 아니다. 전쟁 후 혹독한 궁핍과 뿌리 깊은 가부장제가 맞물린 사회 구조 속에서, 그들은 ‘시대’와 싸웠고 ‘장하게’ 이겨냈다. 누군가는 이 드라마가 ‘가족 판타지의 한계’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맞다. 판타지다. 그 시절 관식같이 지고지순한 남자가 어디 흔했을까. 세 명의 해녀 이모들은 요정처럼 애순의 곁을 맴돌며 평생을 보살피고 위기의 순간마다 한때의 인연들이 나타나 손을 내민다. 허허벌판에 문을 연 가게가 거짓말처럼 흥하고 맏딸은 서울대에 합격해 엄마의 원을 풀어준다. 이처럼 많은 기적이 겹치는 이야기가 현실일 리 없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기적들이 결코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애순과 관식의 일생을 관통하는 1950년부터의 칠십여년, 한국 사회는 ‘초고속 성장’이라는 이름의 판타지를 살아왔다. 모두가 가난했지만 자식만큼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며 분투했던 부모들이 있었고, 쇠약해진 부모를 마땅한 책임으로 여긴 자식들이 있었다. 앞집, 옆집 대문 열어놓고 살며 이웃이 삼촌이고 이모였던 시절이다. 숨 가빴지만 그만큼 기회가 열려 있었다. 조금만 버티면 내일은 달라질 거라는 믿음이 선명했고 당연했다.

천애고아 애순이, 초가집 살며 책 보따리 동여매고 다니던 애순이가 노년이 되어 신형 스마트폰으로 딸과 통화하는 장면에 이르자 구전동화 같았던 이야기가 훌쩍 현실이 된다. 거리에서 지하철 안에서 마주치는 70대, 80대 어르신들이 떠올랐다. 그분들 중 애순이보다 덜 고단한 삶을 살아온 분이 과연 얼마나 될까. 드라마는 아버지, 어머니, 며느리, 가장의 이름으로 살아온 그들에게도 꽃잎 같던 날들이 있었음을 증언하는 기록이자 위로다.

그렇게 총명하고 당당했던 애순이가 할머니가 되어, 이제는 병원 번호표를 잘못 뽑았다고 구박을 받는다. 현실에서도 흔히 마주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다. 거리에는 택시를 잡지 못해 애를 먹고 있는 어르신들이 자주 눈에 띈다. 택시도 앱으로 호출해야만 하는 시대에 그분들은 지나가는 빈 택시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식당의 키오스크 앞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펼쳐진다. 주눅 든 채 주위를 살피다 슬그머니 발길을 돌리는 분들도 많다. 한 시대를 책임지던 분들, 우리를 키우고 가르치고 이 나라를 이만큼 일군 분들이 이제는 택시 한 대 부르기도, 음식 하나 주문하기도 버거운 세상을 살고 있다.

최근 SK텔레콤 해킹 사고가 있었다. 회사가 내놓은 대책은 스마트폰 앱을 통한 유심보호서비스 신청과 유심 칩 교체였다. 앱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은 동네 대리점 앞에 줄을 서거나, 누군가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일이 드러났다. 부모님의 유심보호서비스를 대신 신청하던 자녀들이 사용한 적도 없는 부가서비스 요금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요금이 매달 4만여 원에 이른다는 사연과 함께 대기업에 대한 분노와 그만큼 부모님께 무관심했다는 자책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디지털에 서툰 분들의 허술함을 틈타 대기업이 조용히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니 씁쓸한 일이다.

K-패스나 지역화폐 같은 공공정책도 다르지 않다. 할인 혜택을 제공하지만 앱 설치부터 인증, 사용까지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젊은 세대를 전제로 한 설계가 대부분이다.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으면서 정작 혜택이 절실한 고령층은 소외시키고 있다. 결국 도움 받을 곳 없는 어르신들만 상대적으로 더 많은 값을 지불하게 하는 구조다.

아프리카에는 “한 노인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When an old man dies, a library burns to the ground)”는 말이 전해온다. 한 사람의 생이 경험과 지혜의 총합으로 존경받던 시대의 이야기다. “그땐 그랬지. 시대가 빌런이었지” 하며 드라마를 봤지만, 문득 오늘을 돌아보니 디지털의 차가운 벽 앞에, 부모님의 시대는 또다시 빌런이 되어있다. 이틀 뒤면 어버이날이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