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프렌즈의 구사일생 세계사- 죽다 살아난 인류 생존의 의학사/ 이낙준/ 김영사/ 2만1000원
영국 정치사에서 미국 독립전쟁의 불씨를 지핀 사건 중 하나, 인지세법. 당시 총리 윌리엄 피트가 통풍 발작 탓에 불참한 틈을 타 법안이 통과되면서 보스턴 차 사건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의 아픈 발가락이 미국의 역사를 뒤흔든 셈이다.
프랑스로 파견된 벤저민 프랭클린 역시 통풍으로 고생했는데, 상대 협상가인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그라비에도 통풍 동지였다. ‘야, 너도 통풍?’ ‘나도!’ 공감대 형성으로 프랑스는 미국 독립을 지지하게 된다. 세계사를 바꾼 건 혁명가도 왕도 아닌, 고요한 통증이었다.

중세 유럽의 정치와 경제를 뒤흔들었던 페스트, 러시아제국의 몰락과 혁명을 촉발시킨 혈우병,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아마비 박멸을 위해 한 일들, 20세기 중반 서독에서만 일어난 신생아 기형 대참사, 세계를 중독시킨 커피와 담배, ‘우연한 실수’를 광견병 백신 개발로 이어간 파스퇴르···. 현대 의학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28편의 여정 중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이 없다.
1장에서는 에볼라부터 소아마비까지 전염병이 역사에 미친 영향력과 치료 발전 과정을 살피고, 2장에서는 사랑니, 포경수술, 통풍 같은 일상 속 질병에 대한 인류의 대응 방식들을 짚고 넘어간다. 3장에서는 커피, 담배 등 중독성 물질을 둘러싼 인간의 탐닉과 갈증을 역사적으로 탐색하며, 4장에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외과 혁신의 순간들을 들여다본다.
지금은 아프면 병원에 가지만, 이처럼 ‘당연한 일상’이 가능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엉터리 치료와 기상천외한 시도들이 있었는지, 웃기면서도 섬뜩하고 황당하면서도 감탄스러운 의학의 진면목을 조명한다. 거기에 인간 생존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 문화적 맥락, 우리가 알던 역사적 인물들의 뒷얘기까지 덧붙여 읽는 재미와 앎의 즐거움을 배가한다. 인류를 고통과 질병에서 구원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역사들이 책 안에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