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일기/ 소피 퓌자스, 나콜라 말레/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만5000원
일기란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이다. 많은 이가 날마다 일상을 적어 내려가고 저마다의 역사를 기록해 나간다. ‘내면 일기’는 소설가와 화가, 철학자 등 87명이 쓴 내밀한 일기를 묶어 해설을 단 책이다. 일기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기록물이기에 타인과 공유되는 공공의 성격을 띠지 않는다. 하지만 유명인이 쓴 일기일 경우 얘기가 다르다. 그들의 기록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어떤 경우에는 일기 그 자체가 한 시대 역사를 증언하기도 한다.

“무시무시한 소식이 나를 맞이한다. 나는 거실로 들어간다. 누군가가 말한다. ‘그가 죽었어요.’ 그와 같은 소식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피에르가 죽었다. 오늘 아침 건강하게 떠난 그가, 저녁에 두 팔에 안으려 했던 그가. 나는 죽은 그의 모습만을 다시 볼 것이다. 영원히 끝났다. 당신 이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부른다, “피에르, 피에르, 피에르, 나의 피에르.” 아아, 그를 다시 데려오지 못할 것이다. (…) 사람들이 당신 몸에서 발견한 물건들을 돌려주었다. 당신의 만년필, 당신의 카드 지갑, 당신의 돈 지갑, 당신의 열쇠들, 당신의 시계, 당신의 가엾은 머리가 끔찍한 충격을 받아 으스러졌을 때도 멈추지 않고 작동한 그 시계. 그것은 몇 통의 낡은 편지와 몇몇 서류와 함께 내게 남겨진 당신의 모든 것이다.”(68쪽)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가 파리의 대로변에서 마차에 부딪혀 숨진 남편 피에르의 비보를 접하고 1906년 4월 30일자 쓴 일기다. 당시 그녀의 충격과 아픔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되지만 필체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이성을 되찾고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쓴 듯 보인다. 독자는 그의 일기에서 글자 외적인 것도 볼 수 있다. 나란히 떨어진 눈물 두 방울, 눈물을 머금은 글자들은 다소 흐릿하게 번져 있다.
‘댈러웨이 부인’, ‘파도’, ‘자기만의 방’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생전 26권의 일기를 남겼다. 그녀의 일기에서 우리는 세속적 일상뿐 아니라 여성 소설가로서 동시대인을 바라보는 예리하고 가차 없는 시선을 읽어 낸다. 감동적인 부분은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주기적으로 견뎌 온, 참기 어려운 심한 불안의 발작을 상기하는 대목이다. 그녀는 1894년 어머니의 죽음, 이복 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몇 년간 차례로 겪었다. 1904년 마지막 충격을 겪은 후에는 짧게 입원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1906년에는 오빠 토비를 잃었다. 계속 찾아오는 슬픔을 그녀는 시적이지만 무시무시한 ‘은빛 안개’라고 묘사했다. 책에 실린 1924년 8월 3일자 일기다. “자, 벌써 피어오르는 나의 은빛 안개, 나는 어제의 나를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한다. (…) 주여 내 두뇌는 얼마나 허약한가! 활동하지 않은 근육과 같다. (…) 상상력의 번득임과 책에 대한 취미가 아니었다면 나는 매우 평범한 여자였을 것이다. 내 능력의 어떤 것도 진정 특출하지 않다.”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의 일기에는 19세기 후반 그가 마주했던 타히티섬의 원시 매력이 글과 그림으로 고스란히 실려 있다. 1891년 6월 그의 일기다. “나는 작업하기 시작했다. 모든 종류의 메모를 스케치했다. 풍경 속의 모든 것이 내 눈을 멀게 하고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유럽에서 온 나는 정오에서 14시까지 색깔을 찾으면서 언제나 막막했다. 하지만 화폭에 자연스레 빨간색과 파란색을 칠하는 것은 무척 단순했다. 시냇물 속 황금 형상이 나를 매혹했다. 나는 왜 햇빛의 그 모든 황금과 환희를 화폭에 흐르도록 하는 것을 망설였던가. 필시 유럽의 낡은 습관과 타락한 우리 인종의 전적인 표현의 소심함 때문이리라.” 책에는 단순한 일기 내용뿐 아니라 인물의 필체나 당시의 상황 등을 짐작게 하는 스케치 등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 원본이 도판으로 실려 있다.
202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아니 에르노는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일기는 분노와 소외감으로 지칠 때 궁극의 구원책이었다. 사회와 사랑으로부터 버려진 것만 같은 격렬한 외로움을 치유해 줬다”고 밝혔다. 그의 대표작 ‘단순한 열정’, ‘사건’, ‘집착’, ‘세월’ 등도 일기가 모티브였다. 일기 속 문장들이 집약돼 훌륭한 문학작품이 된 것이다.
이들 외에 시몬 드 보부아르, 프란츠 카프카, 조지 오웰, 앙드레 지드 등의 사랑, 애도, 삶의 위기, 고독, 자기성찰, 역사적 사건, 여행과 같은 주제 아래 묶여 소개된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우리 인생을 관통하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들의 일기에는 꽤 괜찮은 자신의 모습부터 터 차마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드는 모습까지 다양한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두 저자는 “자신을 위한, 자신에 관한 글쓰기, 세상에 혼자 있고 자기가 유일한 결정권자인 작은 종이섬 창조하기, 이것이 일기의 주요 사명”이라며 “내면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일기는 다양한 감정과 사색을 담아내며 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고 말했다. 일기를 쓰지 않았던 독자도 이 책을 덮고 나면 펜과 일기장을 준비할 것 같다. 자신의 평범한 일기가 훗날 다른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는 기록이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