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이응노 화가 예술 혼 담긴 예산 여행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기사입력 2025-05-10 10:39:32
기사수정 2025-05-10 10:39:25
+ -

신여성 김일엽·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거쳐간 예산 수덕여관/ ‘동백림 사건’  옥고 치른 근대 미술 거장 고암 이응노 암각화 작품 남겨/수덕사 선 미술관에  습작 50여점 전시/‘예당호 출렁다리’ 호수 위 설치 가장 길고 높은 주탑 출렁다리 인증/예산시장 레트로 감성 가득/예산사과와인·은성농원에선 사과파이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즐겨

 

예산 수덕여관.

차곡차곡 쌓아 올린 주춧돌 위에 앉은 낡은 초가 한 채. 빛바랜 나무 기둥과 흙벽이 오랜 시간을 얘기하는 수덕여관 툇마루에 앉으니 집을 거쳐 간 많은 이의 사연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 들으며 웅장한 덕숭산을 바라보면 번잡한 생각은 사라지고 마음은 고요하다. 앞뜰에는 한구석을 차지한 암각화. 글씨 같기도 하고 사람을 닮은 것도 같은 대가의 작품에서 짧은 삶을 살면서도 욕심을 결코 놓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 언뜻 스쳐간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이응노 화가 삶이 담긴 수덕여관

 

충남 예산군 수덕사 가는 길. 화사한 봄꽃 지니 녹색이 더욱 짙다. 싱그러운 자연 향기 가슴속 깊이 담으며 20여분 타박타박 걷다 수덕사 선문을 지나면 일주문이 나온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앞뒤로 부처를 새긴 조각작품과 아담한 ‘선 미술관’이 보인다. 특이하다. 사찰에 미술관이 있다니. 이유가 있다. 작은 개울 너머 보이는 초가 한 채가 많은 예술가가 거쳐 간 곳이다. 초가로 들어서자 현판 ‘수덕여관’의 독특한 서체와 예술적 감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근대 미술 거장 고암 이응노(1904∼1989)가 직접 쓴 작품이다. 그는 필묵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동양화 화법으로 국내는 물론 프랑스와 유럽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덕사 선문.
수덕사 선 미술관 입구 작품.

이응노는 초가 앞뜰 커다란 바위에도 작품 두 점을 남겼다. 그는 사람 모양을 글자처럼 바위에 새겼다. 무엇을 그린 것이냐는 물음에 그가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답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암각화는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풀려난 이응노가 수덕여관에 머물며 요양할 때 만들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동독 수도 동베를린(동백림)에서 활동하던 문화예술계 인사 등을 간첩으로 몰아 대거 체포·구속했다. 그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나고 자라고 죽어가는 인간의 부질없는 삶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다. 이응노는 사람들을 단순화된 형태로 반복 표현하며 군중의 움직임과 저항, 고난, 연대를 상징하는 ‘군상 시리즈’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수덕여관 이응노 화각 암각화 작품.
수덕여관

우리나라에 남은 유일한 초가 여관인 수덕여관에 얽힌 사연이 많다. 대표적 인물이 1896년생 동갑내기 친구인 신여성 김일엽과 우리나라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다. 수덕사는 원래는 비구니의 거처였다. 기자와 문인으로 활약하던 김일엽은 사랑과 이별을 거듭하다 1933년 수덕사로 출가했고 4년 뒤 나혜석이 김일엽을 찾아온다. 나혜석은 김일엽을 통해 수덕사 만공 스님에게 불교에 귀의하겠다고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중노릇할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미련이 남은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머물며 그림을 그리고 가르쳤는데 그때 이곳을 찾은 이가 바로 이응노다.

 

수덕여관.

 

 

수덕여관.

나혜석을 스승으로 모신 이응노는 나혜석이 떠난 뒤 1944년 여관을 매입했고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하지만 1959년 아내를 남겨두고 스무 살 어린 연인과 파리로 훌쩍 떠나버린다. 요즘 같으면 세간의 지탄을 받을 일. 하지만 수덕여관을 혼자 꾸리며 살던 전처는 옥고를 치르고 돌아온 이응노를 수덕여관에 머물게 하며 정성껏 돌봤다고 한다. 수덕사 위쪽에서 내려온 개울이 마당 앞으로 흐르는 수덕여관은 방 12개와 부엌으로 이뤄졌다. 수덕여관 개축 당시 이응노 습작 50여점이 발견됐는데 작품들은 현재 선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과 석탑.

덕산온천 근처에 솟은 덕숭산 남쪽 자락에 있는 수덕사는 백제시대인 6세기쯤 창건돼 1500년 역사가 깃든 고찰이다. 예산군 제1경에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문화재가 고루 남아 있다.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 보물로 지정된 노사나불괘불탱 및 묘법연화경과 삼층석탑, 칠층석탑 등 충청남도에서 지정한 문화재도 잘 보존돼 있다. 창건 설화가 전해진다. 한 청년이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졌는데 낭자는 결혼 조건으로 절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절을 지은 뒤 낭자의 손을 잡았더니 낭자는 홀연히 사라졌는데 알고 보니 관세음보살의 현신이었단다. 수덕사 입구 근역성보관에는 다양한 불교 문화재가 소장돼 있다.

 

예당호 출렁다리.
예당호 출렁다리 드론 촬영.

◆아름다운 풍경 즐기는 예당호 출렁다리

 

요즘 예산 여행에서 빠뜨리면 섭섭한 곳이 응봉면 예당호 출렁다리다. 예당호 문화광장으로 들어서자 폭 1.8m, 주탑 높이 64m, 길이 402m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다리가 예당호를 가로지르는 풍경에 탄성이 터진다. 마치 황새가 하얀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것 같다.

 

입구에 한국기록원 인증서 동판이 여러 개 보이는데, 호수 위에 설치된 가장 길고 높은 주탑 출렁다리로 2019년 공식 인증됐다. 내진설계 1등급을 받은 출렁다리는 성인 315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고 밤에 더욱 인기를 끈다. 다리 동쪽에 부력식으로 만든 음악분수대에서 그러데이션 기법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무지개 빛깔 LED 조명이 쏟아져 몽환적인 풍경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수 설비와 함께 워터스크린, 빔프로젝터 레이저로 다채로운 빛과 색을 연출한다. 분수대는 길이 96m, 폭 16m, 고사 높이 110m로 ‘호수 위에 설치된 가장 넓은 면적의 부력식 음악분수’로 한국기록원 공식 인증을 받았다.

 

예당호 출렁다리 전망대.
예당호 출렁다리 전망대.

하나 더 있다. 2019년 4월 6일~2021년 10월 28일 937일 동안 관광객 500만명이 방문해 최단기간 출렁다리 관광객 방문으로 인정됐다. 많이 출렁거리지는 않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살랑거리는 봄바람 즐기며 물 위를 걷는 듯 사뿐사뿐 출렁다리를 걷는다. 중간쯤 주탑 전망대에 오르자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예당호 풍경에 가슴이 시원하다.

 

예당호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예당호와 조각공원, 출렁다리 풍경을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산악열차 방식의 모노레일로 승차정원이 24명이며 예당호 수변 1320m를 약 22분 동안 아주 느리게 운행한다. 출렁다리에서 예당호 중앙 생태공원까지 데크길도 마련돼 있다. 편도 5.2㎞의 느린 호수길은 천천히 사색하며 걷기 좋다.

 

예신시장.

◆예산시장 갈까, 은성농원 갈까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예산시장으로 들어서자 레트로 감성이 가득해 아련한 어린 시절 추억 한 조각을 꺼내게 한다. 공식 시장 인가는 1926년이지만 최초 장이 형성된 시기는 조선 후기 즈음으로 추정된다. 예산읍 상인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팔기 시작하면서다. 시끌벅적하던 시장은 1990년대 인구 감소와 대형마트 등장으로 암흑기가 찾아왔다. 다행이 민관합동프로젝트에 따라 2023년 1월 새롭게 단장한 예산상설시장으로 거듭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매달 5, 10일은 오일장이 열리는데 60년 전통 국밥, 선봉국수, 백술상회, 사과당, 낙원약과 등 다양한 먹거리가 인기다. 아리랑고개 닭꼬치에선 튀김옷을 입혀 가마솥에서 만들어내는 고소한 닭꼬치를 즐길 수 있다. 애플 양과점에선 착한 가격의 애플파이(2500원), 크림 애플파이(3500원)로 작은 행복을 누린다. 예산은 면발이 쫄깃한 국수가 유명하니 꼭 먹어보길.

 

은성농원 사과밭.
정제민 예산사과와인 대표.

예산의 유명한 과일은 사과. 예산사과와인 정제민 대표가 운영하는 은성농원에서는 사과로 만든 와인과 브랜디를 즐길 수 있다. 농원으로 들어서자 귀여운 사과 캐릭터가 반긴다. 사과나무에 꽃이 화사하게 핀 걸 보니 올해 사과는 더 맛있을 것 같다. 예산사과가 처음 재배된 고덕면에 자리 잡은 은성농원은 2만평 사과밭에 6000그루가 무럭무럭 자란다.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한 사과라 맛있을 수밖에 없다.

 

은성농원 사과파이 만들기 체험.

방문객들은 사과파이 만드는 재미에 푹 빠지기도 한다. 레스토랑과 세미나실, 펜션을 갖춘 농원에선 와인 양조와 사과잼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예산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난 곳. 정 대표는 추사의 삶과 정신을 담아 한국을 대표하는 사과술을 만들겠다는 집념으로 추사 애플와인, 사과증류주 추사백 25도, 오크통 숙성 사과브랜디 추사40 등을 선보이고 있으며 여러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사과와인과 오크통 숙성 사과브랜디 원조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에서 생산되는 시드르와 칼바도스. 추사 애플와인에 사과파이를 곁들이면 시드르 뺨치는 맛에 깜짝 놀라게 된다.


예산=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