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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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에게 한 말도 기억 안 나"…병원 교수들 "이젠 한계"

전의교협, 대학병원 여교수 434명 대상 설문조사
92% "곧 한계 도달", 27% "매우 사직하고 싶어"

"당직 다음 날 수술을 하고 나면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단이 안 서는 경우도 있고, 외래를 보면 환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날 때도 있어요."(대학병원 A교수)

"3살짜리 아이가 '당직'의 '당'자만 들어도 울어요. 엄마가 당직하면 같이 못 잔다는 걸 알고 있죠. (병원 일 때문에) 가족에게 악마가 된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멍할 때가 있어요."(대학병원 B교수)

 

의대 증원 등 정부의 의료개혁에 반발하는 전국 의과대학 교수들이 제출한 사직서의 효력이 발생한 지난 25일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대화하고 있다.

의료공백 속에서 그나마 버팀목이 돼온 대학병원 교수들이 체력적인 한계에 이르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사직서를 제출한 교수들의 뚜렷한 이탈 움직임이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교수 10명 중 9명은 이른 시일 안에 체력적인 한계가 오리라 예상하고 4명 중 1명은 강한 사직 의사를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29일 의료계에 따르면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는 지난 12일부터 약 일주일간 전국 대학병원 임상 여교수 434명에게 사직 의사, 근무 시간, 신체·정신적 소진상태 등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가정 내 주 양육자의 역할을 하는 여성 교수들의 고충을 알아보기 위한 조사였지만, 근무 환경에 있어서는 남성 교수들이 느끼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게 전의교협 설명이다.

근무를 할 수 있는 한계에 조만간 도달할 것이라고 답한 비율은 전체의 92.4%에 달했다. 특히 30대 교수 157명의 95.5%(150명), 40대 교수 197명의 93.4%(184명) 등 젊은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계가 임박했다는 응답이 많았다.

사직 의향에 대해 1점(전혀 그렇지 않다)부터 7점(매우 그렇다)까지 나타내는 조사에서는 26.5%(115명)가 7점이라고 답했다. 1점이라고 답한 비율은 전체의 2.3%에 그쳤다.

특히 암 환자 회진 등 내과계 업무를 하는 교수들의 사직 의사가 눈에 띄게 높았다. 내과계 교수는 총 240명 중 34.2%(82명)가 사직 의사와 관련해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전의교협 관계자는 "수술이 필요한 외과계 환자들은 줄었지만, 암 환자 등 내과계 환자들은 입원했을 경우 밤에도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지켜야 하는 만큼 근무 시간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직 의사는 주당 52시간을 훌쩍 넘는 장시간 근무에 따른 것으로 분석됐다. 교수들은 의대 증원에 반발해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근무 시간이 대폭 늘었다.

교수들의 86.6%(376명)는 주 52시간을 초과해 근무하고 있었으며, 80시간 넘게 근무하는 사람은 27.4%(119명)였다. 특히 내과계 교수 중 80시간 넘게 일하는 비율은 33%였다.

당직과 외래 등으로 24시간 근무를 한 교수 가운데 83.3%는 다음날 휴식이 보장되지 않았다. 이 비율은 30대에서 87.5%로 가장 높았는데 60대도 응답자 7명 중 5명(71.4%)이 온종일 근무 후에도 쉴 수 없었다고 답했다.

교수들은 장시간 근무, 36시간 연속 근무에 대해 수련병원들을 근로감독 해달라고 고용노동부에 지속해서 촉구하고 있다.

전의교협 관계자는 "이미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항인데도 노동부는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며 "협의회는 수련병원들을 곧 고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