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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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난 몰라"… 논란 생기면 침묵하는 무(無)책임 안보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차기전투기(F-X) 기종변경, 주한미군 사드 배치 등 굵직한 안보현안에 모두 개입한 인물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 책임이 있다.” 학창시절 수업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한 번쯤은 들어본 기억이 있는 이 말은 공공기관과 기업 등 조직 사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명심해야 할 이야기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지난 4년 동안 권력과 책임의 상관관계를 의식하고 행동한 사례는 많지 않다. 특히 국가의 존립과 직결된 안보, 국방 분야에서 이같은 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차기전투기(F-X) 기종변경과 한국형전투기(KF-X) 핵심 기술 이전 거부 사태, 지난해부터 지속된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사드의 경우 정부는 사드를 구세주처럼 여기며 배치를 서두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10억달러’ 폭탄 발언으로 파장이 확산되자 해명하기에 급급했다. 북한 해커로 추정되는 세력이 지난해 국방망(網)을 해킹해 군사자료를 탈취했지만 형사처벌된 군인은 한 명도 없다. 국민 앞에 책임지는 자세도,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없이 침묵만이 감돌았다. 책임을 묻는 분위기가 감지되면 침묵 모드로 변하는 현 정부 안보라인과 군의 자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총대만 맬 뿐, 책임은 지지 않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사드 배치와 F-X 사업,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등 굵직한 안보 현안마다 총대를 멘 사람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부는 총대를 멘 사람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2013년 차기전투기(F-X) 사업 당시 상황을 다시 살펴보자. 방위사업청은 그해 8월 가격입찰을 통해 후보기종 중 미국 보잉의 F-15SE가 사업비 규모를 충족했다고 밝혔다. 이후 군 안팎에서는 방위사업청의 결정을 놓고 거센 비판여론이 일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9월 24일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이 주재한 방위사업추진위원회는 사업을 원점에서 다시 추진하기로 했고, 결국 F-35A 40대가 도입된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2016년 9월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북핵·사드본부 간담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방추위에서 김관진 당시 장관은 F-15SE 부결에 대해 ‘정무적 판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8조원이 넘는 초대형 무기도입사업이었던 F-X는 MB 정부에서 임기 내 기종선정을 위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서둘렀지만 끝내 매듭짓지 못한 채 박근혜 정부로 넘어왔다.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은 MB 정부에서 등용됐다가 임기가 연장돼 박근혜 정부에 남은 ‘MB 정부 사람’이었다. 특정 기종에 대해 언급할 경우 “로비를 받은 것 아니냐”는 뒷말이 나올 만큼 정치적으로 예민해 기종결정 시기가 계속 지연되고, 방위사업청의 예산 증액요구도 묵살되던 전임 정부의 사업을 전임 정부에서 중용된 사람이 정무적 판단으로 사업 결과를 뒤집은 것이다. 정권 핵심부가 결심하고 김관진 당시 장관이 총대를 멨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최근 주한미군 사드 조기 배치 과정에서 크고 작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김관진 당시 장관의 기종 변경 결정은 박근혜 정부 임기 내내 후폭풍을 불러왔다. 2015년 하반기 국회와 군 당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미국 정부의 한국형전투기(KF-X) 핵심 기술 이전 거부 사태는 F-35A를 도입하기 결정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절충교역과 기술이전 분야에서 록히드마틴의 제안이 다른 업체들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던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국방부는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으로 F-35A 도입 과정에서의 ‘정무적 판단’이 논란이 되자 “군의 요구와 기종평가결과, 작전환경 및 국민적 관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 설명대로라면 기술이전 문제도 당시 정무적 판단에 반영됐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영전한 김관진 당시 장관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절충교역의 일환이었던 군사통신위성도 2015년 9월 비용 문제로 록히드마틴이 사업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는 등 파행을 겪은 끝에 지난해 말 사업 재개 결정이 내려졌지만 사업 지연에 대해 국방부나 방위사업청은 물론 록히드마틴에도 책임을 묻는 분위기는 없었다.
국방부가 경북 성주군 초전면 성주골프장을 사드 배치 지역으로 발표한 2016년 9월30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정문 앞에서 원불교 신도들과 평통사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사드 부지 발표를 규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사드 배치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인터뷰에서 ‘10억 달러’를 언급하며 우리측의 비용부담을 요구하자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김관진 실장과 허버트 맥매스터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의 통화 직후 “기존 합의는 유효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맥매스터 보좌관이 미국 방송에 출연해 ‘재협상’을 기정사실화하는 발언을 한 뒤에도 이같은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사드 배치가 처음 거론된 2014년 당시 국방부 장관은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었다. 사드 배치 논의와 배치 결정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김 실장이 깊숙이 개입했지만 배치 과정에서 발생한 국론 분열과 혼란에 대해 책임 있는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9월 북한 추정 해커에게 군 내부망이 해킹당한 사건은 정권 말기라는 시점까지 겹치면서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다. 군 사이버망 보안과 운영을 맡은 국군기무사령부와 국방정보본부, 국군사이버사령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작전계획 5027 등과 관련된 군사자료가 유출됐지만 형사처벌된 군인은 한 명도 없다. 유출됐다는 군사자료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군 검찰과 국방부는 입을 다물어 축소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 책임 묻는 분위기가 사라진 것이 더 큰 문제

더 큰 문제는 책임을 묻는 분위기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에 있다. 2014년 4월 7일 발생한 28사단 윤일병 폭행사망사건은 엽기적인 가혹행위로 국민들의 경악과 분노를 자아낸 큰 사건이었다. 가해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고, 육군 수뇌부가 통째로 흔들리는 등 군 내부적으로도 여파가 작지 않았다. 하지만 사건 발생 시점을 기준으로 국방부를 맡고 있다가 한민구 전 합참의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관진 당시 장관은 책임을 지지 않았고 정부에서도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모든 뒷수습은 사건 발생 당시 야인이었던 한민구 장관의 몫이었다.
2월2일 방한한 제임스 메티스(왼쪽) 미 국방장관이 황교안(오른쪽) 권한대행을 예방해 환담을 나누고 있다.

KF-X 기술 이전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조사에 나섰지만 방추위에서 정무적 판단을 통해 기종결정을 번복한 김 실장에게 책임을 묻는 분위기는 없었다. 대신 “미국이 기술이전을 해줄 것이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노력만 있었다. 한국과 미국의 안보라인이 사드 배치 비용문제를 놓고 다른 말을 하는 모습이 며칠 동안 이어졌고 경북 성주군 성주골프장에 사드가 전격 반입되면서 현지 주민들이 격렬히 반발하고 있지만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사드가 한국에 들어온 것조차 모르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부 시스템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위엄과 도덕적 권위, 정치적 결단 등을 통해 존경을 이끌어낸다. 이같은 방식은 ‘무오류의 신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문제가 발생해도 수정을 할 수 없는 경직된 시스템이 작동한다. 책임을 지는 순간 ‘오류는 없다’라는 신화가 깨지기 때문이다.
2013년 국군의날 행사에 참여한 장병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여론 수렴 등을 거치지 않은 채 신속하고 단호한 의사결정을 내리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지는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거나 책임을 회피해버린다.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있어도 깔아뭉개고 정책결정을 밀어붙인다. 그러면서 이면 협상을 통해 ‘우회로’를 만들어 문제를 봉합한다.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면 이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책임의식은 사라진다.

변하지 않는 권력의 속성도 한몫 한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직접 처리하거나 지시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권력 핵심부의 의중을 잘 읽고 총대를 메는 사람이 필요한 이유다. 누군가 총대를 메면 권력 핵심부는 그 사람이 과오를 저질러도 책임을 묻지 않고 일정한 수준의 권력을 계속 쥐어준다. 박근혜 전 대통령 집권 기간 안보 관련 정책 추진과정에서 총대를 멘 사람들이 직책을 계속 유지한 것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라는 평가다.

역사를 살펴보면 군인들 중에는 영웅적인 기백과 충성심을 갖춘 군인이 있었지만 관료적인 군인도 있었다. 기백과 충성심을 갖춘 군인은 역경에 직면하면 자신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국가와 조직을 위한 대책을 먼저 강구하면서 책임을 져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 을 졌다. 관료적인 군인은 문제가 생기거나 패전하면 “00 같은 군인을 처벌하는 것은 지금 같은 위중한 정세에서 스스로 손발을 자르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책임을 벗어날 구실부터 찾았다.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지난 4년 동안 자신이 기백과 충성심에 기반해 행동해 왔는지 여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의 무게는 자신이 누린 권력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