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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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도발이냐 대화냐’ 문재인 정부 상대할 북한의 선택은

전래동화 ‘해님달님’에서 호랑이에게 쫓긴 오누이는 밧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지만 썩은 밧줄을 얻은 호랑이는 쫓아가던 도중에 줄이 끊어지면서 떨어져 죽는다. 그런데 오누이를 잡으러 가는 호랑이 앞에 하늘이 두 개의 밧줄을 내려줬다면? 밧줄 두 개 중 하나는 썩은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멀쩡한 밧줄로 잘 잡으면 천국으로 가지만 잘못 잡으면 천길 낭떠러지다. 잘못된 선택은 되돌리기 힘든 만큼 호랑이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2017년 5월, 김일성 탄생 105주년과 북한군 창건 85주년 행사를 마무리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입장도 해님달님의 호랑이와 유사하다. 새로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을 상대할 방법은 두 가지, 군사적 도발과 대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강력한 대북 압박과 중국의 태도 변화 등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남측의 새 정부를 잘못 대하면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겨 그나마 남아있던 외교적 입지마저 사라질 수 있다. 향후 5년간 집권할 문재인 정부를 북한은 어떻게 대할까.

◆대북정책 발표까진 시일 걸릴 듯…외교문제 해소가 우선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3월 18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신형 고출력 로켓엔진 지상분출시험을 참관한 뒤 주변을 돌아보며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이틀째인 11일 북한은 관영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을 통해 “남조선에서 9일 제19대 대통령선거가 진행됐다”며 “이번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 문재인이 41%의 득표율로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며 문 대통령의 당선 사실을 보도했다.

이유진 통일부 부대변인은 12일 브리핑에서 “2012년 보도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상세하게 보도한 것”이라며 “우리 새 정부 출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북한 관영매체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2012년 대선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이름과 득표율 등은 언급하지 않고 대선 결과만 전했다. 이유진 부대변인은 “북한이 1992년과 1997년 대선에는 논평을 통해 남북 간 산적한 과제가 있다면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라든가 어떤 의도가 보였는데 이번에는 이를 촉구하는 내용은 없었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3월 18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신형 고출력 로켓엔진 지상분출시험을 참관했다고 조선중앙TV가 3월 19일 보도했다. 엔진이 점화되면서 불꽃을 뿜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관영매체의 보도 형태로 볼 때, 북한은 문재인 정부의 출범을 지켜보면서 대응 수위를 결정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 대통령은 대선 기간 북한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우발적 군사충돌방지 등을 대북정책으로 공약했다. 이를 위해서는 6자 회담과 양자, 다자회담 등 다양한 형태의 대화가 필수적이다. 지난해 4, 5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국제사회로부터 강도 높은 제재 압박을 받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자신들이 남남갈등을 유발하지 않으면 외교적 고립을 탈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기대대로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이 이른 시기에 윤곽을 드러낼지는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최고의 압박과 개입’ 대북 정책과 우리 새 정부의 대북 정책이 충돌할 위험을 배제하고 탄핵 여파로 공백기를 가졌던 정상외교를 복원하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열수 성신여대 교수는 “한미, 한일, 한중 관계 등 외교문제 해결이 먼저”라며 “대북정책은 국정에 대한 윤곽을 잡고 외교원칙을 수립한 후 추진해도 늦지 않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섣불리 행동하면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있어 발목을 잡힐 수 있다”고 말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도 ‘세종논평’에서 “문 대통령은 한미, 한중, 한일 정상회담을 조기 개최해 새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설명하면서 주변국 지도자들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국무총리와 장관 임명 등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데다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 시급한 안보현안도 해결해야 하는 만큼 새 정부의 대북정책 시행 시기는 늦어질 공산이 크다.

◆ 공은 북한으로…도발 통한 압박 혹은 대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3월18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신형 고출력 로켓엔진 지상분출시험을 참관한 뒤 관계자를 등에 업어주고 있다. 김정은은 국방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얼싸안거나 등에 업는 것으로 그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초기 남북관계가 어떻게 설정될지는 결국 북한의 선택이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던 2012년 12월19일부터 북한은 남측에 대한 고강도 전략, 전술적 압박을 감행했다. 2013년 1월 24일 “높은 수준의 핵실험을 실시하겠다”는 국방위원회 성명 직후 같은해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2월 25일 박 전 대통령이 제18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3월 5일 북한은 정전협정을 백지화하고 판문점 대표부 활동을 중지했다. 같은달 26일 우리측의 국가정보통신망에 접속 장애가 발생했으며, 북한은 군에 1호 전투근무태세 진입을 명령했으며 27일에는 남북 군통신선 단절을 통보했다. 이후 4월 2일 영변 핵시설 재가동 선언, 3일 개성공단 출경 차단, 8일 개성공단 내 종업원 철수 및 개성공단 사업 잠정중단 등 전방위 대남 압박을 감행했다. 이같은 조치는 그해 하반기 남북 대화를 통해 해소됐지만 그 여파는 박근혜 정부 임기 내내 지속됐다.

북한이 2월 13일 노동신문을 통해 공개한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북극성 2형' 발사 장면. 북한 관영매체들은 이날 "우리 식의 새로운 전략무기체계인 지상대지상 중장거리 전략탄도탄 북극성 2형 시험발사가 2017년 2월 12일 성공적으로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
북한의 압박은 우리측의 대북 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압박하는 한편 ‘한반도=분쟁지역’이라는 인식을 대외에 상기시켜 평화협정 체결의 필요성을 선전하려는 의도라는 평가가 많았다. 2014년 북한이 수백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포격훈련과 무인기 침투, 서해북방한계선(NLL) 침범 등을 감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이 문재인 정부 출범과 동시에 남북관계에서 전기를 만들고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남 압박을 가함으로서 새 정부가 대북정책을 최우선순위에 올려놓도록 강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이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 전략적 도발을 감행할 경우 새 정부의 대북정책은 위축될 수 있다. 군 관계자는 “북한은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남북관계와는 별개로 보고 진행하지만 우리나라는 북핵 미사일 위협과 남북 대화를 구분해서 바라볼 수 없다”며 “북한이 전략적 도발을 하면 남북 대화 분위기는 냉각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올해는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시사했기 때문에 도발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해 3월 핵기폭장치를 살펴보면서 간부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반면 기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전략적 도발이 쉽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북한은 다섯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단행했지만 그 위력은 10kt(킬로톤) 수준에 머물렀다. 증폭핵분열탄 실험을 실시했다고 하나 기술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것은 아니다. 6차 핵실험을 감행하려면 기존 핵실험보다 위력이 더 큰 20~30kt 수준의 실험이 필요하지만 군 안팎에서는 북한이 그 정도의 기술력을 보유했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기류가 감지된다.

함북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이나 함남 신포조선소에서 특이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것도 도발 가능성을 낮게 한다. 미국의 북한전문매체 38노스가 2~3일 촬영된 상업용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풍계리 핵실험장 북쪽 갱도에서는 물빼기 작업이 진행됐다. 북쪽 갱도는 북한이 핵실험을 준비하는 장소로 물빼기 작업은 갱도 내 장비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다. 남쪽과 서쪽 갱도에서도 새로운 활동은 없었고 차량이나 사람의 움직임도 없었다. 38노스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관련 시설이 있는 함남 신포조선소에서 시험 발사대에 크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지만 SLBM 탑재 고래급 잠수함은 1년 이상 계속 정박해 있으며 수중발사 시험용 바지선도 6개월째 같은 장소에 있다고 분석했다. 

ICBM 시험발사 역시 대출력 엔진 2~4개를 묶어 1단 추진체를 만드는 작업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완성을 해도 기술적 신뢰성을 검증해야 하므로 시험발사는 단기간에 이뤄지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다만 북한이 스커드 등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나 신형 미사일 시험발사 등 저강도 도발을 통해 일정 수준의 긴장 상태를 유지할 가능성은 남아있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에서 미사일 발사를 자주 진행하면서 단거리 탄도미사일의 정치적 효과가 크게 떨어진 만큼 우리 측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란 관측이 많다. 

지난해 4월24일 북극성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수면위로 솟구쳐 올라 발사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같은 딜레마는 김정은 위원장이 본격적으로 통치를 시작한 2014년부터 누적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최근까지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물려준 몇 안되는 유산인 탄도미사일 전력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하루에 세 차례씩 미사일을 발사하는가 하면 스커드, 노동, 무수단, KN-02 등 모든 종류의 미사일을 동해상으로 퍼부었다. 말 그대로 ‘손에 잡히는 것은 닥치는대로 집어던지는’ 전략은 표적 설정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설익은 전략이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북한의 위협 수단은 미국을 겨냥한 장거리 미사일로 옮겨갔지만 무수단 중거리 탄도미사일 시험발사가 잇달아 실패하면서 무력시위 효과를 반감시켰다.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측의 정치환경 변화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미사일 발사는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아 불확실성을 키우는 방식으로 국제사회와 치열한 수싸움을 벌였다. 그 결과 무너져가던 체제를 보위해 아들에게 물려주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버지만큼의 정치력을 물려받지 못한 아들은 집권 초기 저지른 시행착오 덕분에 미사일을 통한 무력시위 효과를 스스로 떨어뜨렸다.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활동 결과를 지켜보면서 핵, 미사일 기술의 신뢰성을 높인 후 새 정부와 국제사회의 대북정책 변화에 맞춰 판을 다시 짤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군사적 도발과 대화를 병행해야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데 북한 전략군의 탄도미사일 중 우리측과 미국을 압박할 수단은 많지 않다. 핵실험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유일한 방법은 ICBM 시험발사 뿐이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햇볕정책이 북한의 두터운 외투를 벗긴다면 문재인 정부의 달빛정책은 어둠에 가려진 북한의 민낯을 드러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어느쪽이든 체제를 위협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북한 입장에서는 눈앞의 위기를 해쳐갈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 점을 파악하고 실행계획을 수립해 남북관계에서 줄타기를 거듭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어떤 길을 선택할까. 체제 보위냐 권력 기반 상실이냐의 갈림길에서 아버지와는 또다른 줄타기를 앞둔 김정은 위원장의 선택이 주목된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