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미술과 문학의 제대로 된 만남

◇시간을 키워드로 우주를 이야기하고 있는 조형미술가 안종연(57)이 작품설명을 하고 있다.
마치 우주에 있는 듯 하다. 작품 ‘빛의 에젠’은 바닥에 하얀 모래를 깔았고 유리구슬과 조명을 이용해 환상적인 우주를 담았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사람이 우주고, 시간이 우주를 여는 키워드다. 생성과 소멸의 시작이 시간이고, 우주는 그 순환을 담는 공간이다." 조형미술가 안종연(57)은 생성과 소멸, 우주와 시간에 대해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문학가 박범신(63)의 소설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이를 시각언어로 표현한 작품들은 '시간의주름전'이라는 주제로 학고재 본관과 신관에서 3일부터 28일까지 선보인다. 

◇남여 나신의 실루엣이 다양하게 겹쳐 보이는 작품 ‘박범신’. 소설가 박범신은 “내 인생이 들어있는 것 같다. 작품에 나와 있는 남자의 체격도 나와 비슷하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작명을 했다”며 안종연 작가의 작품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다.
"나는 화가에게, 화가는 나에게 서로 최대한 빼내야 다른 상상력이 나온다"고 말한 박범신은 자신의 소설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안종연에게 맡겼다. 안종연은 "선생님의 책을 보면 그림이 느껴진다. 책에 그림이 제시되어 있더라"라고 말했다. 이들은 여러차례 만나 대화를 하면서 이번 전시를 3년동안 준비했다.

작품의 재료는 다양했다. 작품'고산자'는 소설'고산자'에서 나무에 지도를 그린 김정호의 일생를 담기 위해 나이테가 잘 빠진 나무를  이용했다.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은 작품 '바이칼의 에젠'은 열경화성 플라스틱의 일종인 에폭시와 크리스털 가루를 사용해 소설 ‘주름’에 나오는 깊고 아름다운 바이칼호수를 표현했다. 그는 유리, 돌, 조명, 스테인리스 등 다루기 어려운 소재들까지 이용한다.

"나는 몸을 혹사하는 직업이다. 작업장에 있으면 시간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안종연의 작품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작품 '새날들의 시작'은 아크릴 안에 에폭시와 맑은 안료를 떨어뜨려 굳히고 다시 떨어뜨리는 과정을 여러 번 거쳤다"고 설명했다. 박범신과 자신의 인물을 새긴 초상화는 "사진을 찍고 따로 다른 종이에 스케치했다. 그것을 스테인리스에 전동 드릴로 쪼아서 형상을 새겼다"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거쳤다. 스테인레스를 캔버스 삼아, 드릴을 붓 삼아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박범신의 표현대로 '당찬 여자'였다. 

◇작품 ‘고산자’는 나무의 결을 이용해 인두로 지져 만들었다.
◇작품 ‘바이칼의 에젠’은 소설‘주름’에 나오는 바이칼 호수를 표현했다. 밑그림을 그린 뒤 에폭시를 붓고 다시 그림을 그리고 에폭시를 붓는 수많은 과정을 거치고서 크리스털 가루를 뿌려 반짝임을 더했다.
안종연은 "주름이 있어야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박범신의 철학을 작품 곳곳에 담았다. 특히, 60여점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주름을 만들어 내는 작품'만화경'은 '시간의 주름'이라는 전시 주제를 잘 보여준다.  

박범신은 자신의 소설을 ‘재료’로 한 안종연의 ‘요리’에 대해 "스펙트럼이 넓다. 아주 인상적이다. 그 동안 그림은 틀안으로 한정돼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한정된 틀을 벗어난다"고 말했다. 이어 안종연 작가에 대해  "나의 소설을 예술로 표현할 적절한 작가"라고 평했다. 

◇작품 '빛의 에젠'은 빛과 함께 유리 구슬, 거울 등을 통해 전시장 벽과 천장에 환상적인 ‘빛드로잉’을 선사한다.
소설 '고산자'에서 김정호는 "이제 바람이 가는 길을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길을 내 몸 안에 지도로 새겨 넣을까 하이" 라는 말을 남기며 마포나루에서 떠난다. 박범신은 "김정호가 시간의 지도 바람의 지도를 그린다더니 '이제사 그 소원을 이뤘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소설에서 이루지 못했던 김정호의 꿈은 안종연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박범신은 "80년대 '장르주의'가 등장한 이후 예술이 너무 구별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뜻 깊은 작업이었다"고 전시소감을 밝혔다. 전시회에서는 6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02)-720-1524 

차유나 인턴기자(한림대 언론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