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젠장! 목숨 걸고 사랑했던 여자가 산업스파이였다니. 삶은 늘 이렇게 소리없이 다가와 뒤통수를 후려치고 능청을 떨지. 그래도 삶의 틀은 바뀌지 않을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개백정이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평생 폐차장에서 잡일만 하던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태양은 뜬다고 믿었지. 그래서 개털 타는 냄새 가득한 시골집에서 벗어나려고 죽어라 공부했고 유능한 컨설턴트가 되었던 건데. 스파이였던 여자를 사랑했던 게 인생의 실수였나? 그래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 하지만 1년 만에 희망은 작살이 나고 말았어.
해고 당한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아르바이트밖에 없었던 거야. 식당에서 불판 닦고 개를 산책시키는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만이 살 길이었어. 불판도 정성스럽게 닦았고 개들도 컨설턴트의 실력을 발휘해 꼼꼼하게 산책을 시켰지. 그런데 개들도 내 뒤통수를 치더군. 산책 나온 다른 애완견을 물어 죽여 버리고 만 거야. 설상가상으로 고시원에서도 쫓겨나고 식당에서 어렵게 얻은 잠자리도 잃고 말았지. 삶은 어디까지 곤두박질칠까?
그래도 나는 고꾸라지지 않아.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았거든. 역할 대행 사무실인데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면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웃기는 소장이 있는 곳이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당장 일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역할자 노릇을 시작했어. 어떤 여자의 오빠가 되기도 했고, 어떤 녀석의 아빠가 되어주기도 했어. 애인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고 결혼식 하객으로도 많이 참석했지. 과연 이런 생활로 내 인생의 새로운 태양은 뜰까?
그런데 기회가 왔어.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짱아오 종의 개를 산책시키게 되었던 거지. 게다가 개의 주인은 돌싱이었거든. 그건 분명 기회였어. 기회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거거든. 그러려면 나도 준비를 해야지.
그에 걸맞은 남자가 되기 위해 개를 산책시키면서 명품 구두에 양복을 입기 시작했지. 그리고 비록 월세지만 오피스텔도 다시 얻었고 최신 스마트폰도 장만했지.
하지만 사랑이 내 뒤통수를 쳤듯이 그 개도 결국 내 튀통수를 치더군. 목줄이 풀어진 사이 도망가서는 오래전에 죽은 제 주인의 무덤으로 달려갔던 거야. 게다가 한국에서의 삶이 싫다며 인도로 도망간 형마저 사막 투어에 나갔다가 죽고 말았지.
이렇게 인생이라는 게 한번 꼬이면 제대로 풀어지지 않는 걸까? 뒤틀린 인생 때문에 한 가지 알게 된 건 태양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이었지. 그건 나처럼 루저가 될 수밖에 없는 자들이 갖는 환상인지도 몰라. 하지만 말이야…. 진짜 내 인생에 태양 같은 건 없는 걸까? 그럴지도 몰라. 태양은 늘 저 멀리, 손도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혼자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뿐,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전민식
[제8회 세계문학상]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줄거리
기사입력 2012-01-31 18:27:15
기사수정 2012-01-31 18:27:15
기사수정 2012-01-31 18:27:15
유능한 컨설턴트였던 삶이 곤두박질…‘개 산책’으로 인생역전 기회 맞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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