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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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침체·콜택시에 치여… 그 많던 모범택시 어디로

[S 스토리] '모범택시'의 흥망성쇠
멀리 보이는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번쩍 들었다. 방향지시등을 켜며 다가오는 차량이 모범택시임을 확인했을 때… 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거나 정색하며 딴곳을 쳐다본 경험이 있다. 어쩌다 기사분과 눈이 마주칠 땐 ‘모범택시는 뭐가 다르기에…’ 하는 호기와 호기심에 그냥 타볼까 망설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비싼 요금이 부담스러워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그런데 이젠 지방 도시 중 모범택시가 운행 중인 부산, 대구, 광주에서는 이런 경험도 더 이상 하기 힘들다. 이들 지역은 1990년대 중반부터 모범택시를 도입해 한때 세 도시의 모범택시는 1000대에 이르렀지만 약 20년의 세월을 거치며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현재는 100여대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많던 모범택시 어디로?

대구시에 등록된 모범택시는 현재 27대가 전부며 모두 개인택시다. 처음으로 도입된 1995년 당시 88개 업체 모범택시 262대와 개인 모범택시 20대로 시작했다. 모범택시는 차츰 증가해 한때는 450여대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IMF 사태를 거치면서 지역 경기 침체로 승객이 줄자 그 많던 모범택시도 대부분 사라졌다. 애초부터 수요예측이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와 함께 모범택시의 가장 큰 메리트였던 ‘콜택시 시스템’이 2000년도 중·후반부터 일반택시들에 보편화된 것도 모범택시의 ‘몰락’을 앞당긴 이유다.

부산 역시 1994년 490여대로 시작해 현재는 78대만 남아있다. 대구와 비슷한 시기에 모범택시 30여대로 시작한 광주도 한때 70대까지 늘었으나 현재는 5대만 운행하고 있다.

현재 국내 운행 중인 모범택시는 서울 1827대, 경기 351대, 인천 54대 등 수도권에 99.5%가 몰려 있고 세 도시에 남은 모범택시는 모두 110대로 전체의 0.5%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남아있는 이들 모범택시마저 채산성을 이유로 공항과 기차역, 터미널에 시동을 끄고 손님을 기다릴 뿐 더 이상 공차(空車) 상태로는 승객을 찾아 도로를 달리지 않는다.

◆남은 자들의 횡포

최근 아이를 데리고 부산 친정에 다녀온 서울 시민 이지선(32)씨는 부산역에서 모범택시로부터 승차를 거부당했다.

“그땐 짐이 많았고 아기도 안고 있고 해서 모범택시를 타려고 했는데 ‘가까운 거리는 일반택시를 타라’고 하더라고요. 모범택시는 승차 거부를 안 할 줄 알았는데 내심 놀랐죠.”

대구에서 가장 많은 모범택시를 볼 수 있다는 동대구역. 그러나 12일 오후 이곳 모범택시 승강장에는 단 한 대가 정차하고 있었다. 탑승하려 뒷좌석 문을 열자 앉기도 전에 대뜸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는다. 약 5㎞ 떨어진 행선지를 얘기하자 “곧 들어갈 시간이라 그쪽으로는 갈 수 없다”며 일반택시 승강장을 가리킨다.

“그냥 가주시면 안 되나요”라고 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타라는 손짓을 하곤 시동을 건다. 백미러로 보이는 표정은 굳어 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진 끝에 모범택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는 “오늘 3시간 가까이 기다려 처음 받은 손님이라 아깐 좀 그랬다. 이해해 달라”며 “보통 4∼5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다. 다시 동대구역에 가서 대기 차량이 없으면 다행이지만 한 대라도 있으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될지 모른다”고 했다. 이해가 될 법한 얘기였다.

서장하(59) 대구 모범택시연합회장은 “물론 그렇게 하면 안 되지만 실제 동대구역은 가까운 거리를 가려는 승객과 실랑이가 자주 일어나기도 한다”면서 “하루 평균 한두 명을 태우는 게 전부라서 장거리 가는 손님을 받지 않으면 밥값, 기름값도 충당하기 쉽지 않다 보니 생긴 문제”라고 말했다.

수익성 때문에 20년 새 10분의 1로 줄어든 모범택시와 공항과 기차역, 터미널 등 정해진 장소에서의 낮은 회전율, 먼 곳이 아니면 가지 않겠다는 기사. 이러한 연유로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 고품격을 추구하던 모범택시는 일반택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다지 ‘모범스럽지’ 않은 택시가 돼가고 있다.

서울역 앞의 한 택시정류소에 손님을 기다리는 모범택시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이재문 기자
◆이원화의 실패

모범택시와 일반택시의 차이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서울대 고승영 교수(전 대한교통학회장)는 “우리나라에서는 웬만한 거리는 3∼4명이 모이면 버스 대신 돈을 모아 택시를 탄다. 우리나라처럼 택시가 대중교통 기능을 해온 곳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며 “대부분 국가들의 택시의 위치는 과거 우리나라의 모범택시 정도의 위치”라고 말했다. 이어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택시의 요금 상승폭에 비해 모범택시들의 요금 상승폭은 낮았다. 이러다 보니 차이가 점점 없어지고 있으며 비단 요금 외에도 모범택시가 처한 문제의 본질은 특색 없는 이원화, 기능 구분에 실패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1990년 초 900원이었던 일반택시 요금은 현재 3배 이상 오른 반면 당시 3000원에서 시작한 모범택시 요금은 현재 서울 기준 5000원으로 두 배가 채 되지 않는다. 대구의 경우 모범택시 기본요금은 4000원, 일반택시 요금은 2800원이고 거리 및 시간당 요금은 각각 200원과 100원으로 두 배 차이지만 야간할증이 없어 0시부터 오전 4시 사이에 요금 차이는 거리가 짧을수록 차이는 더욱 줄어든다.

고 교수는 “지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일반택시의 정부 지원을 늘려 요금을 낮추고 대중교통 기능을 강화하든가 모범택시의 차별화된 고급화를 추구하는 것이 해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다 본다”며 “후자의 경우 해결책이 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을 것,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대구=이정우 기자, 전국종합 woo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