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강주미의 짜이 한 잔] 1000년의 세월 오롯이…카주라호의 석상들

거대한 사원에 층층이 조각된 상
노을이 지면 사원은 한층 더 차분해진다.
인도 ‘카주라호’는 사원 사이에 지어진 마을이다. 예전에는 사원이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20개소 정도만 남아 있다.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것으로 지금은 성지로 꼽힌다. 이 사원들은 여행지로서도 유명하다. 성적인 묘사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주라호에는 성에 관련된 기념품이 많다. 하지만, 성에 관련된 것들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보러 갈 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다. 
잔잔한 호숫가에 새들이 날아든다.

사원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 자전거를 빌려 다니기로 했다. 무더위에 걷기도 힘들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달리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흙길이라 힘들기는 하지만 걷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자전거를 빌린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낮에는 관광차들이 사원 앞에 멈춰 선다. 그러면 관광객 무리가 사원을 둘러싸고,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분주해진다. 그런 순간을 피하려고 자전거를 타고 외곽지역으로 달렸다. 힘들게 길을 오른 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이 나오고, 그때부터는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자전거를 타고 외곽지역 사원을 향한다.

호수에 앉아서 잠시 쉬려고 했는데, 그 새 해가 호수와 만나고 있었다. 그 둘은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연인처럼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가 호수를 물들이고 있는 건지, 호수가 해를 삼켜버리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둘은 열정적인 노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해와 호수가 만나 열정적인 노을이 만들어진다.

카주라호 마을에는 작은 식당이 많은데, 한국어로 쓴 메뉴판도 존재한다. 어설프게 쓴 글씨지만 한국어로 한국 음식을 메뉴판에 써놓았다. 물론 김치볶음밥이라고 쓰여 있다고 해서 인도, 그것도 카주라호에서 그럴싸한 한국 음식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 나는 일반적인 볶음밥을 시켰다. 기호에 맞게 주문하면 인도 사람들은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채소와 닭고기를 넣어서 볶아 달라고 했더니, 맛있는 냄새가 풍기고 곧 기대하고 있는 밥이 나왔다. 그런데 나온 음식을 본 순간 몇 초간 정지화면이 돼버렸다. 맛있게 볶은 밥 위에는 마치 장식이라도 하듯이 커다란 파리가 몇 마리 놓여 있었다. 가게 주인에게 말했더니 역시나 개의치 않는다.그냥 내 손으로 파리만 건져내고 먹는 게 낫다는 생각에 그냥 먹었다. 다행히 배도 고팠고, 음식이 맛있어서 먹을 수 있었다. 
햇살이 사원을 비추며 훨씬 더 따뜻한 색을 더해준다.

카주라호에는 유난히 파리가 많다. 까맣고 큰 점들이 어디든 붙어 있는데, 근처에 가면 그것이 파리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파리떼만큼이나 무서운 건 호객꾼들이다. 호객꾼들은 사원을 안내해주거나 식당, 기념품점 등을 홍보한다. 처음엔 호객꾼들이 떨어지지 않는 파리떼처럼 보이긴 하지만, 카주라호에서 며칠을 지내다 보면 얼굴을 익혀서 그 이후에는 나에게 오지 않는다.
천 년을 버텨 온 돌을 만지면 그 세월을 느낄 수 있을까.

다음 날에는 사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거대한 사원에 층층이 조각된 상들이 상당히 정교하다. 미술용어로 ‘미투나’는 성행위를 묘사한 작품을 말한다. 이곳 미투나상은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 신과 인간의 결합에 대해서 표현한 조각들로 단순하게 성적인 의미로만 보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다. 힌두교 이야기로 접근해보면 이 석상들을 더 재미있게 바라볼 수 있다. 붉은 돌을 깎아서 만든 석상은 마치 돌 안에서 형상이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감히 그 석상에 손을 대면 그 세월이 느껴지면서 따뜻함이 전해진다.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사원은 햇살을 받아서 더 많은 색을 낸다. 1000년을 넘게 버텨 온 이 석상들을 감상하며 지금까지 버텨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 
붉은 화강암에서 느껴지는 색감은 따뜻하다.
돌 안에서 형상이 드러나듯 조각된 석상은 하나하나 의미가 있다.


인도 여행에서 바라나시만큼이나 호불호가 갈리는 곳이 바로 카주라호다. 미투나상으로 생긴 선입견 때문이다. 카주라호를 더 느긋하게 더 자세히 바라본다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동부, 남부 사원은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듯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둘러보면 좋다. 서부 사원은 석상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찾아낸다면 생각과는 다른 카주라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홀리 축제는 봄을 알리는 색의 날이다.

카주라호에 머무는 동안 봄을 알리는 ‘홀리 축제’가 시작됐다. 농사 기반의 나라들은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시기가 되면 축제를 한다. 지금에야 축제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전통이고 한 해 농사를 기원하는 제사다. 인도에서는 이런 전통이 홀리 축제로 발전하면서 전 지역에서 거대한 색이 퍼지는 날이 되었다. 색 가루를 물풍선이나 물총에 넣어서 사람들에게 던진다. 얼굴과 몸에 직접 색을 칠하기도 한다. 마을 전체가 색색으로 물드는 시기다.
홀리 축제에 준비된 색 가루들이 인도 전 지역을 물들게 한다.

나는 아침부터 벌벌 떨면서 방 안에 있었다. 밖에만 나가면 어느 곳이나 인산인해인 것이 인도인데, 홀리 축제 때는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카주라호가 아니었다면 나도 나가서 즐겼겠지만, 카주라호에서는 위험하다. 숙소 주인도 웬만하면 외출하지 말라고 귀띔해줬다. 그러면서, 쿠키를 구워서 가져다 줬는데 차마 먹을 수 없었다. 이날 인도인이 주는 음식에는 환각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불법이 아니긴 하지만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홀리 축제에는 사람들이 얼굴과 몸에 색을 칠한다.

숙소에서 밖을 구경만 하면서 하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인도에서 다음 행선지를 선택할 때는 거리를 생각해야 한다. 이동거리가 긴 구간을 가기보다는 중간 지점을 거쳐서 가야 힘들지 않다. 목적지가 있어도 중간에 한 지점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딱히 목적지가 있지는 않았지만, 타지마할은 보고 싶었다. 타지마할을 가기 전에 ‘오르차’라는 작은 마을을 다음 행선지로 꼽았다.

여행작가 grimi79@gmail.com

<세계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