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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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 안녕하십니까] 사기에 울고 폭행에 떠는 노인들

연령대별로 본 ‘행복과 불행’
세상 변화 어둡고 신체 능력 떨어져… ‘범죄 표적’ 된 노인들
“늙어서 아무것도 모르니깐, 우리 같은 사람만 노리는 것 같아.” 지난달 11일 오전,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혼자 살고 있는 김순래(가명·92) 할머니는 “개인정보가 유출됐으니 은행에 맡겨둔 돈 1500만원을 인출하라”는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김 할머니는 따로 사는 자식들이 모아준 소중한 돈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했다. 득달같이 평소 거래하던 종로구의 한 은행을 찾아갔다. 김 할머니는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다행히 사기라고 직감한 은행원의 도움으로 돈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은행원의 신고로 출동한 서울 혜화경찰서 소속 파출소 경찰들은 할머니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사복으로 갈아입고 2시간여 잠복수사에 들어갔지만 범인은 잡지 못했다.

김 할머니는 21일 전화통화에서 “죽을 때까지 쓰려고 아껴둔 돈이었는데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하다”며 “소식을 들은 자식들이 ‘어지간하면 밖에 나가지 말고 낯선 사람은 만나지도 말라’고 하더라”며 한숨을 지었다.

세상 변화에 어둡고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60대 이상 노년층이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경제활동을 않고 심신도 약해 범죄 피해를 당하면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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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수건 짜내는 ‘노인 사기’


다행히 금융사기를 모면한 김 할머니와 달리 사기를 당하고 속을 끓이는 노인들이 적지 않다.

‘경찰범죄통계’에 따르면 61세 이상 노인 대상 범죄 2011년 7만6624건에서 지난해 13만6839건으로 4년새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체 범죄 건수가 175만2598건에서 177만8966건으로 2만5000여건 정도 소폭 증가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난 2월 투자 사기를 당한 고명래(가명·79) 할머니는 범인이 경찰에 잡힌 지 한 달이 넘도록 피해 금액인 1억원을 돌려받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특별한 수익 없이 서울 마포구에서 살고 있는 독거노인 윤 할머니에게 이 돈은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자신의 노후자금 4000만원이 사라지면서 생계가 막막해졌고 피해 금액 일부를 빌려줬던 동생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됐다. 윤 할머니는 “합의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며 “나 혼자 먹고살려고 모아뒀던 돈 전부를 잃어 당장 월세도 못내고 미루고 있는 상황”이라고 울먹였다.

효능과 가격을 터무니 없이 부풀린 건강기능식품, 의료기기 등으로 건강 문제에 예민한 노인들의 주머니를 터는 사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노인을 상대로 건강기능식품이나 의료기기 등을 허위·과대광고해 파는 ‘떴다방’ 업체 85곳이 적발되기도 했다. 노인 대상 사기 범죄는 노년층의 노후 자금을 빼앗는 파렴치 범죄다. 지난해 61세 이상 노인 대상 범죄 중 사기 범죄는 2만2990건에 달했다.

노인사기 피해 예방 활동을 하고 있는 ‘사단법인 한국노년복지연합’의 이명규 정책국장은 “정보에 어두운 노인을 대상으로 한 사기꾼들은 피해자의 가족 이야기를 하며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뒤 노인의 호주머니를 터는 수법을 사용한다”고 주의를 촉구했다. 윤 할머니도 오래전에 고인이 된 부친과 친분이 있다는 일당의 꾀임에 넘어간 경우다. 이 국장은 “다른 사기보다 노년층이 대상일 때 그 피해 정도가 치명적인 경우가 많다”며 “대부분 일정한 수입이 없어서 사기 피해를 보면 원상복구가 어렵고, 심하면 가족에게서까지 버림받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젊은이’가 무서운 ‘어르신’


“이제 젊은 애들하고는 눈도 못 마주치겠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서울 종로3가를 거의 매일 찾는다는 김정래(70) 할아버지는 얼마 전 심야시간대 지하철역 부근에서 20대 남성 4명에게 둘러싸여 폭행을 당할 뻔했다. 술에 취한 이들이 김 할아버지와 몸을 부딪친 뒤 시비가 붙은 것이다. 김 할아버지를 구석에 몰아 놓고 어깨를 밀치던 그들은 주변의 시민들이 모여들자 자리를 떴다. 그날 분을 삭이지 못해 평소 먹지도 않는 술까지 마셨다는 김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내 몸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정말 늙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몹시 서러웠다”고 말했다.

노인들은 돈을 노린 범죄뿐만 아니라 폭력에도 쉽게 노출된다. 지난해 61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한 폭행은 1만66건을 기록했다. 살인이나 강도, 성폭행 같은 강력범죄까지 합하면 노인 대상 범죄는 2만6411건에 이른다.

지난 5월 새벽, 전북 전주시에 사는 A(70) 할아버지는 길을 걷다 어깨를 부딪친 김모(19)군에게 20여분간 폭행당해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 김군은 강 할아버지에게 치료비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며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체격이 왜소한 강 할아버지를 노린 고의성 범죄였다. 지난달 말, 강도상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군은 법원으로부터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여성 노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도 증가 추세다. 여성 노인 대상 강간·강제추행 등 성범죄는 2012년 297건, 2013년 394건, 2014년 419건으로 매년 늘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경북 칠곡군에서 한 30대 남성이 혼자 사는 70대 노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하는 패륜 사건이 발생해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우리 사회의 미덕이었던 노인 공경 문화가 날로 희박해지면서 노인 대상 범죄도 늘고 있다”며 “자기방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노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 범죄는 그 피해가 더 참혹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