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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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김정일의 유언과 김정은의 조롱

“사상·군사적 제압 후 남북교류”
‘10·8 유훈’ 따라 핵 개발 강행
대한민국·한미동맹 뒤흔들어도
핵 위협 못 느끼는 정치권 한심
북한의 핵무기 위협이 갈 데까지 가고 있다. 네 차례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탄도로켓에 이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까지 성공해 의기양양하다. 이처럼 위협 수위가 날로 높아져도 정치권은 뒷짐만 지고 있다. 야당들은 기초적인 핵·미사일 방어시스템인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에 어깃장을 놓고 있다. 강도가 흉기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는데도 대문 빗장을 걸지 말라는 격이다.

SLBM 시험발사 현장을 참관한 북한 김정은은 “미국이 아무리 부인해도 미 본토와 태평양 작전지대는 이제 우리 손아귀에 확실하게 쥐여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가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낀 채 활짝 웃는 사진이 함께 공개됐다. 대한민국 전체를 비웃는 듯하다.

조정진 논설위원
북한의 잇단 핵·미사일 시험을 지켜보니 김정일의 유언이 담긴 ‘10·8 유훈(遺訓)’이 떠오른다. 사망 두 달쯤 전인 2011년 10월 8일 작성한 것으로, 권력승계를 비롯해 통치·통일·대외전략 등 44개 항목이 촘촘히 담겨있다. 2012년 공개 당시엔 반신반의해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요즘 돌아가는 정황이 ‘10·8 유훈’과 꼭 들어맞는다. 북한은 김일성·김정일의 말과 지시를 초헌법적인 것으로 여기며 정책 집행 기준으로 삼는다. 김정일 유언을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다.

핵과 관련해 김정일은 “핵, 장거리미사일, 생화학무기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충분히 보유하는 것이 조선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임을 명심하고 조금도 방심하지 말 것. 합법적인 핵보유국으로 당당히 올라섬으로써 조선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김정은 체제가 존재하는 한 핵을 포기할 리 없다는 이야기다.

이런 내용도 있다. “6자회담을 잘 이용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이 회담을 우리의 핵을 없애는 회의가 아니라 우리의 핵을 인정하고 우리의 핵 보유를 전 세계에 공식화하는 회의로 만들어야 하며, 우리에 대한 국제적 제재를 풀게 하는 회의로 되도록 해야 한다.” 6자회담 유용론을 주장하던 당국자나 학자, 언론인들이 머쓱할 정도다.

중국에 대한 관점은 남과 북이 별반 다르지 않다. “중국은 현재 우리와 가장 가까운 국가이지만 앞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국가로 될 수 있는 나라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를 가장 힘들게 했던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사드를 반대한다며 중국을 방문했던 6명의 국회의원에게 귀띔해 주고 싶은 내용이다.

통일문제에 관한 유언은 섬뜩하다. “현 남조선 정권 하에서는 북남 관계 개선이나 통일이 불가능하다. 남조선의 다음 정권과의 관계에서 사상적으로 철저한 우위를 차지하며 그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한 상태에서 경제·문화교류를 시작으로 통일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북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천안함 폭침, 지뢰도발 등을 감행하는 이유다. 남한 제압용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북핵은 미국과의 협상용이라는 주장은 설 곳이 없다. 김정일은 또한 “전쟁을 통한 통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가 이겨도 결국은 후대들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했다. 전면전을 하면 남북이 모두 망가진다는 것을 북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남한에 연북정권이 들어서 북에 바치거나 연방제를 통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킨 후 내전을 치르겠다는 것이 애오라지 북의 통일전략이다.

이러한 북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정치권은 핵실험 전에는 “북한이 핵개발 한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하더니, 2006년 1차 핵실험 후엔 “압박과 경제제재는 오히려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호도했다. 1998년 미국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정보를 한국에 알려줬다. 하지만 정책 결정자들은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조작”이라며 무시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시 정부의 잘못된 대북 인식을 문제 삼는 정치인은 안 보인다. 외려 대권을 꿈꾸는 잠룡들은 여야 할 것 없이 실패한 대북정책 계승을 이야기한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조롱하는 이유다.

조정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