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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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진의 밀리터리S] '맹물전투기' 사고와 저질 군납 '윤활유' 납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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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군은 이른바 ‘맹물전투기’ 추락사고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1999년 9월 공군 F-5F 전투기가 예천기지를 이륙한 직후 야산에 추락해 조종사 1명이 사망하고 다른 1명은 중상을 입었는데, 조사결과 사고의 원인이 전투기 결함이 아니라 연료탱크에 기름과 물이 혼합된 오염된 항공유를 채워 비롯된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전투기 연료탱크에 물을 채워 비행에 나섰다는 것은 그야말로 해외토픽감이었다.

한술 더떠 당시 조성태 국방장관이 국회에 보고한 내용은 우리 군의 유류 관리가 어느 정도로 부실했는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저유소 라인 급유대의 안전장치(스위치)가 잠금상태로 고정돼 작동되지 않았고, 유류탱크에 물이 흘러 들어갈 경우 물을 차단하는 부품조차 없었으며, 보조 유류탱크에 대해 여과를 실시해야 한다는 규정은 사문화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군의 부실 유류 관리에 놀란 국회 국방위원회는 진상조사단을 꾸려 예천저유소 등 주요 공군 저유소에 대한 현장조사에 나섰다. 이와 함께 저유탱크 시공업체, 시공업체와 군 당국 간의 유착관계 등에 대해서도 전방위 조사를 벌였다. 그리고는 앞다퉈 군의 안전관리 불감증을 비판했다. 당시 자민련 이동복 의원은 “각종 저유 및 급유 시설들이 구비하고 있는 단계별 점검 계기가 전혀 작동되지 않았고, 장병들도 안전수칙을 준수하지 않았다”면서 “이번 사고는 공군참모총장이 아닌 국방부 최고지휘부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졌던 맹물전투기 사고는 지난 25일 경찰이 공개한 저질 군납 윤활유 사건으로 다시 불거졌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이날 저가 윤활유를 특수 윤활유로 속여 공군에 납품한 혐의(공문서 위조·행사 등)로 군납 화학업체 대표 이모(58)씨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공군 부사관 출신 이씨가 2014년 4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방위사업청에 34차례나 저가 윤활유를 납품했다고 했다.

이씨는 정품 특수 윤활유 용기와 비슷한 용기에 저가 윤활유를 담아 위조한 정품 상표를 붙인 뒤 수출하는 형식으로 미국으로 보냈다. 특수 윤활유는 납품 계약업체인 방사청이 미국 현지에서 구매한다는 군납 계약의 허점을 노린 것이다. 방사청은 이씨가 해외화물보관소에 선적한 저가 윤활유를 아무런 의심없이 국내로 들여와 군에 보급했다. 정품임을 증명하는 시험성적서와 수입신고필증도 위조된 것이었다. 윤활유가 정품인지 확인하는 검수 절차도 생략됐다. 그저 눈으로 수량과 포장 상태, 파손 여부만 확인했을 뿐이다.

군에 납품된 저가 윤활유는 공군의 훈련기인 T-11에도 채워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비행 이후 엔진 실린더 헤드가 손상되는 사고가 잦았다. 하지만 결함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여러 대의 T-11이 엔진 진동 문제로 회항하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군은 그러려니 했다.

보통 일반인들이 자동차 엔진의 떨림이나 진동이 느껴질 경우 제일 먼저 의심하는 부분이 윤활유 계통이다. 항공기 엔진에 이상이 발생할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이번 저질 윤활유 납품 사건은 군의 안전불감증이 비리를 키웠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군의 한 관계자는 “최악의 경우 항공기 추락 등 사고 위험이 있었지만 모르고 지나갔다가 이번 경찰 수사로 원인을 파악하게 됐다”면서 “맹물전투기 사고때나 지금이나 군의 안전불감증은 달라진게 없는 것 같다”고 혀를 찼다.

박병진 군사전문기자 worldp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