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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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한민구 장관님, 사드에 대해 할 말이 그것뿐입니까?”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2일 오전 제16차 아시아 안보회의 참석을 위해 인천공항을 통해 싱가포르로 출국하고 있다. 영종도=연합
청와대가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발사대 4기 추가 반입을 국방부가 보고 과정에서 누락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법령에 따른 적정한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하도록 국방부에 지시했던 5일 오후 5시20분, 서울 용산 소재 국방부 청사 1층 로비. 조류독감(AI) 대책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온 한민구 국방부 장관을 기자들이 에워쌌다.

청와대의 발표에 대한 국방부의 입장이 궁금했던 기자들은 스마트폰을 한 장관 가까이에 갖다대며 그의 발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잠깐 동안의 어수선함이 정리되자 한 장관이 발언을 시작했다.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관계관들은 조사 과정에서 충분히 소명했다. 국방부와 군은 군 통수권자이신 대통령의 지침을 확실하게 구현할 것이다.” “환경영향평가와 관련해서는 절차적 정당성을 더욱 높이라는 지침이기 때문에 국방부가 그런 방안을 검토할 것이다.” 기자들이 “2단계에 걸쳐 부지를 공여하기로 한 것은 사실이냐”고 물었지만 한 장관은 대답하지 않은 채 국방부 청사를 떠났다.

이 모든 것이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분. 청와대가 지난달 30일 “대단히 충격적”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반응과 함께 진상조사를 공개지시하면서 시작된 사드 보고 누락 파문에 대한 한 장관의 입장표명은 너무나 짧았고, 짧았던 만큼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한 장관이 물러나기 전 추가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달 30일 오후 경북 성주군 성주골프장에서 사드 발사대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성주=연합
◆ 한 장관이 밝혀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가장 큰 논란은 주한미군에 공여하기로 한 부지 면적이다. 사드가 배치된 경북 성주군 성주골프장 전체 면적 148만㎡ 가운데 실제 골프장으로 사용됐던 면적은 70만㎡다. 국방부는 지난 4월 주한미군에 성주골프장 부지 중 32만여㎡를 공여했다. 주한미군이 국방부에 보낸 사드 포대 시설설계에 따르면, 레이더와 발사대 등 실제 군사시설 설치 지역은 8만~10만㎡정도며 나머지는 완충지대다. 청와대는 “국방부가 일반 환경영향평가를 피하려고 공여방식을 변경해 지난해 11월 25일쯤 1단계로 32만여㎡를 공여하고 나머지는 2단계에서 공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주장은 국방부가 기존에 밝혀왔던 것과는 상반된 것이다. 국방부는 청와대가 사드 발사대 보고 누락 조사결과를 발표하기 전 “발사대 4기가 들어와도 부지 추가 공여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청와대는 2단계 부지 공여 계획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왼쪽)이 5일 오후 예방한 빈센트 브룩스 한미 연합사령관(오른쪽), 방한 중인 제임스 시링 미 국방부 미사일방어국장과 면담 전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청와대도 국방부도 지난해 11월25일 이후부터 실제로 부지공여가 이루어진 지난 4월까지 성주골프장 부지 공여 계획이 어떻게 추진됐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군사기지를 건설할 때, 사업 계획 및 설계 단계에서 변수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 계획에 수정이 이뤄지기도 한다. 만약 2단계 부지공여 계획이 존재했고 지금까지도 효력이 있다면 공여 부지 면적을 기준으로 일반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해야 한다는 청와대 주장에 힘이 실린다. 그러나 2단계 부지공여가 국방부 내부 논의 단계에서 폐기됐거나 주한미군과의 협상과정에서 배제됐다면 환경영향평가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여기에 주한미군이 사드의 조기 가동을 위한 압박책으로 국방부와의 부지공여 협상과정을 공개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 한 장관이 모종의 행동을 취할 필요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4월 27일 경북 성주군 성주골프장 부지에 배치된 사드 발사대 주변에서 미군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성주=연합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맞서기 위해 사드가 시급히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한 설명도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해 2월 사드 배치 논의가 시작됐을때부터 국방부는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가능한 빨리 배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누누이 밝혀왔다. 미국도 괌북한 무수단 중거리 탄도미사일과 은하-3호의 추락 위협에 맞서 괌에 사드를 배치할 때 2013년 사드를 먼저 배치하고 2015년 환경영향평가 초안을 공개했다.

그런데 지난 7일 청와대 관계자는 사드 배치에 대해 “환경영향평가를 생략할 만큼 긴급을 요하는 사안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지난 10년 동안 북한 핵, 미사일 위협이 늘 존재했기 때문에 사드 배치가 화급한 사안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북한이 매주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미국 본토 공격 능력과 한반도 타격능력을 확장하는 현 정세 하에서 청와대의 주장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북한 위협 평가를 담당하는 군을 대표하는 국방부의 수장으로서 북한 핵, 미사일 위협에 맞설 사드의 조기 배치 완료 필요성 여부에 대해 언급이 필요한 이유다.

◆ 국방부 직원들을 위해 해야 할 마지막 말 한마디

위승호 국방부 정책실장이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국정기획자문위에서 열린 비공개 국방부 업무보고에 참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하상윤 기자
국방부가 지난달 26일 청와대 국가안보실 보고 당시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반입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락했다는 청와대의 조사결과 발표 직후 보고 누락의 핵심 인물로 지목돼 직무에서 배제된 위승호(육사 38기, 중장)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이 육군 정책연구관으로 인사조치되면서 국방부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국방부 차원의 경위 조사와 감사원의 정책감사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국방부 관계자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상황 전개를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군 내부에서는 하루아침에 군복을 벗어야 할 위기에 놓인 위 전 실장이 안타깝다는 기류도 감지된다. 군 관계자는 “국방부를 향해 쏟아지는 총탄을 위 전 실장 혼자서 다 맞고 나간 격”이라며 “개인적으로는 위 전 실장 처지가 참 딱하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같은 기류 밑에는 ‘위 전 실장이 청와대 국가안보실 보고서에서 사드 발사대 추가반입을 자의적으로 누락했을까?’라는 의문이 깔려있다. 위 전 실장을 잘 아는 인사들은 그가 규정이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청와대가 “사드 보고 누락과정에서 한 장관의 혐의는 확인된바 없다”고 밝혔지만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주요 사안인 사드 배치에 대한 보고 과정을 한 장관이 몰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다. 한 장관의 처신을 놓고 물밑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인식에 기인한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군과 관련된 인물들의 리더십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1993년 10월 모가디슈 전투에서 미군 특수부대원 19명이 전사하고 80명이 부상당하자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던 레스 애스핀은 한 달 뒤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반면 2차 세계대전 당시였던 1944년 3월 인도 공격 과정에서 작전에 실패하고 일본군 5만여명을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게 했던 무다구치 렌야는 종전 직후 “부하의 무능 때문에 작전에 실패했다”고 변명하며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때문에 일본 극우세력조차도 그를 비난한다.

사드 보고 누락 파문 직후 한민구 국방부 장관의 처신을 놓고 군 내부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국방장관은 군 내 다른 직책보다 더 큰 무게감을 갖는다.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장군 포기한 대령’이라는 뜻의 ‘장포대’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부터 ‘장관 포기한 대장’이란 의미로도 쓰이는 이유다. 무게감과 권한이 크면 책임도 그만큼 큰 법이다. 부하직원이 과실을 저질렀을 경우 그 책임은 상관에게 있는 것처럼 사드 보고 누락 파문의 최종책임은 위 전 실장이 아닌 한 장관에게 있다. 일각에서는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사의를 표명한 한 장관이 실질적으로 책임을 질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정부부처 수장으로서 청와대와 맞서는 모양새를 취할 수 없는 처지를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위축될대로 위축된 국방부 민간 공무원들과 현역 간부들, 전방에서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장병들을 위해 카메라 앞에서 “이번 일은 내 부덕의 소치다. 부하직원들을 비난하지 말고 내게 책임을 물어달라”는 말 한마디 정도도 할 수 없었을까. 이미 사의를 표명해 더 잃을 것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은 상징적 의미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 한 마디가 국방부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는 작으나마 위로가 될 수 있다.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은 군인들이 꿈꾸는 최고의 자리다. 그 자리를 모두 역임한 한 장관은 군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셈이다.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수습하는 자세. 그것이 바로 국방부에 남아서 환경영향평가 재검토 등 사드 후속조치를 이행해야 하는 부하직원들, 자신에게 수많은 혜택과 기회를 주었던 군을 위한 최고의 보답일 것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