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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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불법 정치 개입' 파문] 사찰 전담조직 존재 유무·여론조작 지시 배후 누구일지 주목

법조계 ‘강제수사 의혹 규명’ 목소리
세계일보가 일부 공개한 국가정보원의 청와대 보고서는 많은 의문을 갖게 한다. 정치개입 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민감한 내용의 보고서를 누구 지시로 다수 작성했으며, 어느 선까지 보고됐느냐가 핵심이다. 2012년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 심리전단의 일부 조직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 전모는 베일에 가려있다. 본지가 입수한 보고서 내용을 감안하면 심리전단뿐 아니라 다른 국내 정보 파트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정원이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를 구성해 정치개입 의혹 사건에 대해 재조사한다는 방침이나, 이명박 청와대와 국정원의 연루 의혹을 얼마나 파헤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특히 박근혜정부 임기 말 다수의 문건이 소각·폐기된 것으로 알려져 재조사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선 검경의 강제수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국정원 사이버팀의 실제 활동 더 드러날까

국정원이 18대 대선을 앞두고 인터넷 여론조작을 할 당시 국정원은 심리전단 아래에 4개의 사이버팀을 두고 있었다. 각 사이버팀의 명칭은 안보 1팀, 안보 2팀, 안보 3팀, 안보 5팀이었다. 이 중에서 흔히 댓글부대로 알려진 팀은 안보 3팀과 안보 5팀이다. 안보 3팀은 블로그, 다음아고라, 오늘의 유머, 보배드림, 뽐뿌 등의 인터넷 커뮤니티 여론공작을 담당했고, 안보 5팀은 트위터에서 활동했다. 안보 3팀과 안보 5팀의 인원이 각각 24, 23명인 점을 감안하면 사이버팀의 전체 인원은 80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까지 검찰 수사로 드러난 국정원의 선거개입 혐의는 안보 3팀과 안보 5팀에 국한돼있다. 다른 안보 1팀과 안보 2팀의 활동, 더 나아가 심리전단 전체의 활동은 알려져있지 않다. 일단 국정원은 안보 1팀은 대북심리전 사이트 운영과 대북 사이버 심리전을, 안보 2팀은 국내 포털 사이트상 북한 선전 대응활동을 했다는 입장이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본지가 전날 보도한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장악’ 보고서는 국정원이 대선을 앞두고 벌인 활동의 전모를 추측하는 실마리가 된다. ‘SNS 장악’ 보고서를 보면 국정원은 보수적 사회 유명인사 육성, 보수언론 지원 등 온·오프라인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페이스북에 대한 장악력 확대 등의 기획은 이제까지는 트위터에 가려 주목받지 못한 부분이다. 따라서 국가기관이 만일 이 부분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진행한다면 국정원이 실행에 옮긴 여론조작 공작의 전모가 드러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박근혜 보고서 53장에 어떤 내용 담겼나

청와대 A행정관이 갖고 나온 715건의 청와대 보고서 중 53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관련한 내용이다.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뒷조사 내용 등이 담겨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제목이나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명박정부 시절 청와대와 박 전 대통령의 관계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인 점을 감안하면 내용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증폭된다. A행정관은 나중에 박 전 대통령과 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자료를 챙겨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국정원이 정식 계통을 밟지 않고 자신들을 관할하지도 않는 정무수석실에 몰래 보고한 건 보고서의 내용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을 내놓고 있다. 정식보고를 밟으면 청와대 내부 기록에 남아 나중에 누군가가 이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개인 근황이나 주변 인물에 관한 정보보다는 당시 정국과 관련한 정치인 사찰 보고서 수준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A씨가 국정원 보고서를 받아본 2011년 하반기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가 당선되고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가 뒤로 물러나면서 박 의원을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진 시기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내용일 수 있다.

첨부된 선거사범 수사상황 국가정보원이 2011년 10·26 재·보궐 거 직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10·26 재보선 선거사범 엄정처벌로 선거질서 확립’ 보고서. 국정원은 야권·좌파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엄단해야 한다며 검찰과 경찰의 수사 현황을 첨부했다.
이미지 개선 제안 국가정보원이 2011년 10·26 재보선 직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2040세대의 대정부 불만 요인 진단 및 고려사항’ 보고서. 국정원은 20∼40대가 선거 때마다 야권 후보로 쏠림을 보인다면서 ‘불통’ ‘독단’ 등 이명박 대통령의 이미지를 개선할 것을 제안했다.
◆무차별적 동향 보고… 누구를 위해, 왜 작성됐나

모든 의문은 한 곳으로 귀착된다. 이 보고서의 종착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국정원이 청와대에 올린 보고서는 ‘SNS 장악’, 야권 정치인에 대한 사찰, 검경의 표적수사 등 국정의 전 분야를 총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보고서를 읽고 지시를 내릴 만한 인물이 ‘독자’일 것이다.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 국정원 보고서를 받아본 건 거의 확실시된다. A행정관은 밀봉한 봉투에 담긴 보고서를 단지 김 전 수석에게 전달하는 역할만 했다고 사정기관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김 전 수석이 국정원 보고서를 읽고 다시 누구에게 전달했는지가 사건을 해결하는 핵심 열쇠다. 이를 확인할 만한 직접적인 단서는 없지만 일부 국정원 보고서에는 ‘대통령님’이라는 표현을 담고 있기도 하다. ‘2040세대의 대정부 불만 요인 진단 및 고려사항’ 보고서는 이 전 대통령의 이미지와 관련해 “일로서 승부하는 저돌적 면모가 종북좌파들의 레토릭 공세 속에 불통·독단 등으로 변질됐다”며 “대통령님의 탁월한 추진력과 리더십은 ‘독단’으로, 4대강 사업·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등의 업적은 ‘남의 잔치’로 인식되는 딜레마가 반복됐다”고 적었다. 청와대 보고서임을 감안해 ‘대통령님’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정무수석 ‘윗선’에도 보고됐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특별취재팀조현일·박현준·김민순 기자 so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