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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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자원의 보고 선점하라”… 강대국 ‘북극혈투’에 환경파괴 우려

‘해양영토 확장’ 치열한 쟁탈전
지난 7월 말 노르웨이 함메르페스트를 출발한 러시아 선적의 쇄빙LNG(액화천연가스)운반선 크리스토프 드마르주리호가 지난달 17일 충남 보령에 도착했다. 선박이 이 구간을 운항할 때 보통 40일 넘게 걸리지만 이번엔 20일이 안 걸렸다. 유럽에서 우리나라로 올 때 대체로 이용하는 수에즈 운하와 인도양 대신 북극해를 이용해 거리를 줄인 덕분이었다. 북극항로가 각국 선박의 물류 항로로 각광받고 있다. 태평양·대서양·인도양을 가로질러 넘나들던 선박들이 북극항로를 이용하면서 물류비도 줄고 있다. 북극 인근엔 원유와 천연가스 등 자원도 다량 매장돼 있어 강대국들이 개발에 적극적이다. 러시아와 미국 등은 지구온난화 속에 첨단 쇄빙선을 도입해 탐사에 앞장서고 있다. 북극 개발로 지구의 자연환경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도 크지만 각국의 ‘동토 혈투’는 당분간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자원의 보고, 물류 신항로

북극은 자원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세계 원유 매장량의 25%와 천연가스 매장량의 45% 정도가 북극에 묻혀 있다는 게 대체적인 추정이다. 니켈과 아연 등 다른 광물자원 매장량도 적지 않다. 광물자원 이외에도 미국이나 러시아 등이 눈독을 들이는 대상은 차고 넘친다. 원양어업 영역이 확장되면서 북극 연안의 어획량도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불과 2∼3년 안에 북극 연안에서 세계 어획량의 37%가 확보될 것으로 추정된다.

신규 물류 항로의 장점도 매력적이다. 물류 항로 개척은 지구온난화와 쇄빙선 기능 개선으로 가능하게 됐다. 해마다 북극의 여름 기온이 높아지면서 빙하가 녹는 기간이 길어지자 러시아 등 해양강국의 쇄빙선이 곳곳을 누비고 있다. 쇄빙선이 개척한 항로를 따라 각종 자원과 상품을 실어 나르는 선박이 증가하고 있다. 

폭스뉴스는 “2014년 기준으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민간 선박은 연간 1만6596척에 달했지만, 북극항로를 이용한 선박은 71척에 불과했다”면서도 장기적으로 북극항로 이용 선박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선박들은 북극 연안을 활용하면 사실상 최단 거리를 항해하며 물류 거리를 단축시키게 된다. 선박회사들이 물류비용을 줄여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면 생산자와 소비자에게 모두 이익을 줄 수 있다. 당장 동남아와 유럽 사이를 운항하는 우리나라 선박들은 기존 인도양과 수에즈운하 대신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물류비용을 3분의 1 이상 줄일 수 있다. 대륙을 오가는 공산품은 대부분 북반구에서 생산, 소비되지만 물류는 남반구의 수에즈운하를 이용했던 그간이 약점이 사라지게 된다.

국제법에 따르면 북극해는 특정 국가가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1982년 채택된 유엔 해양법협약과 1987년 국제사회가 합의한 ‘북극권 개방 선언’에 따른 것이다. 기술과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모든 나라가 북극에 진출할 수 있지만, 국제사회는 북극해와 인접한 국가의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인정하는 예외 조항을 뒀다. 미국과 러시아, 캐나다, 노르웨이, 그린란드 5개국이 당사국이다. 기존의 EEZ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 국가는 대륙붕 연장을 통해 해양영토 확장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의 알래스카 연안 진출 등 국가별 중점 진출 방향은 자국의 상황을 최대한 고려해서 정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부각될지 모를 ‘북극해 영유권’ 내지 ‘북극해 실효적 지배’ 효과를 선점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국제사회의 대응도 이어졌다. 미국과 러시아, 캐나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아이슬란드, 핀란드 등 북극권 8개 나라는 1996년 정부간 협의체 ‘북극이사회’를 창설해 북극 관련 정책을 조율하고 있다. 각국의 이견이 크지만 자원 개발과 북극항로 개척, 기후변화 문제 등을 논의하고 있다. 

◆미·러의 각축… 갈등 큰 또 하나의 ‘남중국해’?


오랜 기간 미개척지였던 북극 개발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북극 영토의 40%를 점하고 있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북극 개발을 핵심 국가정책으로 삼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13년 지하자원 개발과 물류 인프라 구축, 산업 기반시설 개선 등을 주요 내용으로 북극 개발 청사진을 제시했다.

코트라(KOTRA) 모스크바 무역관 보고서에 따르면 19세기에 비교적 온화한 지역을 배경으로 시작된 러시아의 북극 개발은 1930년대 석탄과 비철금속을 채굴하면서 본격화됐다. 군사시설 증대와 인구 증가를 거치면서 21세기 들어 북극 개발은 좀더 탄력을 받게 됐다. 러시아는 현재 쇄빙선 수십척을 보유하며 지속적으로 북극에 대한 접근 통로를 넓히고 있다. 쇄빙선은 항로 개척용도 뿐만 아니라 긴급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용도로 개발되고 있다. 이동성도 고려하면서 무기도 탑재하고 있다. 러시아는 랭걸, 코텔리 섬 등을 포함해 자국의 북동부 해안을 축으로 개발 지역을 확장하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에 비해 더딘 움직임을 보여왔다. 운영하고 있는 쇄빙선이 2척뿐인 미국은 2015년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 러시아의 북극 접근에 자극받아 새로운 쇄빙선 건조를 제안했을 정도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기후변화에 냉소적이지만 북극해 개발엔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공화당 소속인 던컨 헌터 하원의원은 “미국은 중동 등에서만 러시아에 밀리는 게 아니라 북극에서도 경쟁에 뒤처지고 있다”며 “러시아가 운영하고 있는 쇄빙선은 40척에 달하지만 미국은 고작 2척뿐”이라고 개탄했다.

북극 개발엔 ‘북극이사회’ 옵서버 국가로 참여하고 있는 한·중·일도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이 가장 적극적이다. 중국은 북극해와 지하자원은 특정 국가의 소유가 아니라며 북극 탐사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북극 탐험 능력을 높이기 위해 잇달아 쇄빙선을 건조해 상선을 운영하고 있다. 민간을 중심으로 30년 넘게 북극해 연구를 활발히 전개해 온 일본도 언제든지 경쟁에 불을 지필 태세다. 2009년 국내 최초의 쇄빙선 아라온를 건조한 한국도 최근 극동·러시아를 포함한 북극 연안 탐험에 적극 나서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북극 개발에 뛰어들고 있는 나라들이 늘면서 ‘북극 혈투’가 전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개발 경쟁으로 인한 우려도 증폭되고 있다.

미 해군 제독인 폴 주쿤프트는 WP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대륙붕 지역에 러시아와 중국의 접근이 늘고 있다”며 “알래스카에 연한 대륙붕은 텍사스주 정도의 크기로, 탐사기술이 개선되면 채굴이 가능한 원유와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멀지 않은 미래에 ‘북극 논란’이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의 재판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남중국해는 중국이 군사시설을 설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주변국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지역이다.

강대국들의 북극 개발 경쟁은 당분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북극 개발에 관한 특정한 국제조약이나 규범이 없기 때문이다. 북극과 달리 남극은 ‘남극조약’으로 국제사회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북극항로 개척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거세다. 북극항로가 개척될수록 빙하가 더 많이 녹을 것이고, 이는 장기적으로 북극해 축소를 부르는 악순환을 부를 것이라는 경고이다. 유전과 광물자원 개발로 중금속이 유출되면 환경오염이 심해질 우려도 크다.

동식물 생태계가 직면할 위협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무차별적인 북극 개발이 인류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이 같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북극이사회가 중심이 돼 개발경쟁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북극이사회의 설립 취지대로 북극권의 환경 보호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좀더 세밀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국제사회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남극조약과 같은 북극조약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워싱턴=박종현 특파원 bal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