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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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찰나에 잊혀질라 온몸으로 불태운다

가을이 스쳐가는 강원 태백
"추위가 등 떠밀기까지 채 한달도 머물지 않는 강원도의 가을… 짧은 동안 제 빛을 다 보여주려는 듯 더 붉고 화려한 단풍… 전쟁 땐 붉은 피로 덮였다던 피냇재·철암천변 벌써 가을로 물들었다"

여름의 무덥고 습한 바람이 완전히 사라졌다. 선선하고 청량한 가을 바람이 그 자리를 채운다. 바람 맛을 한껏 느껴보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싶어지는 때다. 조금만 더 지나면 살을 에는 찬 바람에 숨쉬기조차 거북스러워진다. 갈수록 가을의 바람 맛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불교에서 시간의 최소단위를 나타내는 찰나처럼 가을이 지나가는 듯하다.

찰나의 가을을 대표하는 것은 단풍이다. 얼마 있으면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을 테다. 그 전에 화려하게 자신을 불태우고 있다. 마치 이 찰나를 꼭 기억해달라는 것처럼 말이다.

갈수록 짧아지는 가을이지만, 그중 가을이 가장 짧은 곳을 꼽자면 강원 태백이다.
강원 태백은 해발 평균 고도 700m에 위치해 있다. 전국 어느 곳보다 가을이 찰나에 지나간다. 겨울이 빨리 찾아와 가을이 짧은 만큼 태백의 단풍은 화려하다. 철암천변은 지금 붉디붉은 단풍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고유 수종인 당단풍이 철암천 한 편을 꽉 채우고 있다.

태백은 해발 평균 고도 700m에 위치해 있다. 여름이 그리 무덥지 않은 태백은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 그만큼 가을이 짧다. 날이 좀 선선해졌다 싶으면 어느새 칼바람이 몰아친다. 전국 어느 곳보다 가을이 찰나에 지나간다. 특히 가을을 알리는 단풍은 채 물들기 전에 떨어진다. 하지만 짧은 만큼 태백의 단풍은 화려하다.

붉게 물든 단풍의 화려함을 느끼려면 높은 산 위로 올라가야 하지만, 태백은 아니다. 본디 높은 곳이다 보니 곳곳이 붉다.

그중 철암초등학교 앞 철암천변은 지금 붉디붉은 단풍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언제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없지만, 고유 수종인 당단풍이 철암천 한편을 꽉 채우고 있다. 단풍이 비친 철암천도 붉은빛을 띠며 흐른다. 붉은빛이 강해 가을을 대표하는 높고 푸른 하늘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분명 수십년 전에도 이 단풍들은 한껏 붉은빛을 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먹고살기 바빴던 그때는 ‘그냥 곱다’라며 한번 쓱 흘려 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붉은빛을 띤 철암천은 그때에는 검게 흘렀다. 강을 그리라고 했더니 강물을 검은색으로 칠했다는 일화가 나온 곳이 바로 탄광촌 태백 철암이다. 시내도, 건물도, 얼굴도 모든 것이 검게 느껴졌을 곳이다. 이런 곳에도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가을의 낭만이 찾아왔겠지만, 딴 세상 얘기였을 테다.

단풍이 한창인 철암천 옆이 피냇재다. 피냇재는 6·25전쟁 당시 전투가 심하게 벌어져 붉은 피가 산을 덮고, 내를 흘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검정과 빨강이 철암천의 색일 듯하다.
태백 철암역앞 탄광역사촌은 옛 모습을 그대로 활용해 역사촌을 조성했다. 하천 바닥에 놓인 지지대 ‘까치발’이 그때의 흔적이다. 사람이 몰려들자 주거 공간을 늘리려 하천 바닥에 철재, 목재 등으로 지지대를 세우고 집을 넓혔다.
구문소도 단풍이 한창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다. 고생대 지층이 융기해 조성된 곳이다. 오랜 세월 거센 물줄기가 뚫어놓은 절벽과 그 아래 웅덩이를 구문소라 한다.
피냇재를 넘으면 선탄시설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져 현재까지 가동하고 있는 국내 최초의 무연탄 선탄시설 철암역 선탄장이다. 이곳에서 석탄을 분류하는 선탄 작업이 끝나면 기차에 실어 전국으로 수송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서 묵호항으로 석탄을 나른 뒤 일본으로 가져갔다.

탄광이 활황일 땐 작은 동네에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살았지만, 지금은 3000여명에 불과하다. 당시의 흔적은 선탄장 앞 탄광역사촌에서 찾을 수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활용해 역사촌을 조성했는데, 하천 바닥에 놓인 지지대 ‘까치발’이 그때의 흔적이다. 사람이 몰려들자 주거 공간을 늘리려 하천 바닥에 철재, 목재 등으로 지지대를 세우고 집을 넓혔다.

철암천만큼 붉지 않지만, 구문소 역시 단풍이 한창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다. 철암역에서 차로 5분 정도면 이르는 곳으로 고생대 지층이 융기해 조성된 곳이다. 오랜 세월 거센 물줄기가 뚫어놓은 절벽과 그 아래 웅덩이를 구문소라 한다. 구문소는 ‘뚜루내’로 불렸다. 계곡물이 바위 절벽을 뚫고 흐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폐역인 추전역은 해발 855m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역사다. 역에 설치된 바람개비와 단풍으로 붉게 변하고 있는 매봉산 자락의 풍력발전기가 어우러진 모습이 이색적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억5000만∼3억년 전 바다였던 곳이다. 땅이 솟구치고 뒤틀리는 지각변동으로 단절된 여러 형태의 단층을 볼 수 있고, 소금의 흔적, 삼엽충 같은 고생대 생물의 흔적이 발견됐다. 구문소를 중심으로 주위 바위절벽에 고개를 내민 나뭇잎이 노랗고 붉게 변하고 있는 중이다. 구문소에는 고생대 선캄브리아기에서부터 신생대 인류의 출현과 발전을 살펴볼 수 있는 고생대 전문 박물관이 조성돼 있다.

고즈넉한 가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는 추전역도 빼놓을 수 없다. 해발 855m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역사다. 철암 탄광이 활황일 때는 연탄 수송을 위해 붐볐을 곳이지만, 지금은 폐역이다. 겨울이면 눈꽃열차가 운행된다. 찾는 이 없지만 역사 내엔 역장과 역무원의 제복 및 모자, 깃발 등이 배치돼 있어 역무원 체험을 할 수 있다. 역에 설치된 바람개비와 단풍으로 붉게 변하고 있는 매봉산 자락의 풍력발전기가 어우러진 모습이 특색 있다.

태백=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