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S 스토리] "괜히 나섰다 봉변 당할라"…'방관자 사회'

연인 싸움 말렸더니 성추행 피소… 도와주고 누명 쓰는 우울한 현실
“남의 일엔 절대 나서지 마 알았지.”

경기 광명에 사는 주부 장모(48)씨는 최근 청소년인 두 아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남의 일에 나서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특히 얼마 전 수능을 치른 첫째가 걱정이다. 조만간 성인이 되는 아들이 온갖 돌발상황을 만날 텐데 행여나 젊은 혈기를 부렸다가 곤경에 처할까봐서다. 두 아들은 “괜한 걱정 말라”고 핀잔을 주지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에 장씨의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범죄자로 몰리거나 다치는 등 독박만 쓰는 게 현실 아닌가요. 이기적인 게 아니라 합리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장씨의 생각은 확고했다.

장씨처럼 많은 이들이 주위 사람들이 위기에 빠져 도움이 필요한데도 나서지 않는 ‘방관자’가 돼가고 있다. 낯선 사람이 처한 위기를 보고도 모른 척 넘어가는 ‘제노비스 신드롬(방관자 효과)’이 짙게 드리워진 셈이다.

제노비스 신드롬은 1964년 키티 제노비스(28)란 여성이 새벽 시간대 뉴욕 주택가에서 살해를 당하는 과정에서 30여명의 목격자가 자기 집 창가에서 범죄 현장을 30분 넘게 지켜봤지만 누구도 나서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심리학 용어다.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걸 주저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실제 사람들이 ‘나서지 않아’ 상황이 악화한 사건들이 국내에서도 잇따랐다. 지난 9월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준 ‘부산 여중생 집단 폭행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피해 학생이 대로변에서 머리채를 잡혀 400m가량을 끌려가는 상황을 목격한 시민들이 적잖이 있었지만 신고는 단 한 건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대로변에선 24세 남성이 별거 중인 아내를 흉기로 수차례 찔렀지만 이를 목격한 시민이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지나치면서 아내가 숨지기도 했다.

문제는 주위의 어려움을 외면한 이들에게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괜히 나섰다가 피해를 입거나 의로운 참견자들이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험이 켜켜이 쌓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위기 상황이 펼쳐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왜 하필 내 앞에서…’, ‘괜히 피해를 보지는 않을까’ 등 무수한 생각이 머리를 스칠지도 모르겠다. 무자비한 폭력과 피가 난무하는 현장이라면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나서서 해결해야 할까, 못 본 체 돌아서는 게 맞을까.’

◆“괜히 나섰다가 봉변만” 외면의 이유들

8일 세계일보가 취업포털 ‘인크루트’에 의뢰해 조사(응답자 281명)한 결과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위험에 빠졌거나 도움을 요청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 중 이를 ‘외면했다’는 응답은 27.8%나 됐다. 또 타인의 범죄 피해를 목격했을 때 ‘가급적 나서야 한다’는 응답(33.1%)보다 ‘나서지 말아야 한다’거나 ‘상황에 따라 결정한다’는 응답이 66.9%로 배 이상이었다.

나서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는 △피해자가 사라지면 궁지에 몰릴 수 있기 때문(35.2%) △폭행 등 범죄 위험에 처할 수 있어서(25.9%) △경찰 조사 등이 번거로울까봐(13%) 등이 꼽혔다. 남의 일에 나섰다가 되려 범죄자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구조를 망설이게 한 가장 큰 이유인 셈이다.

이런 걱정은 괜한 게 아니다. 선의로 타인을 도왔다가 곤경에 빠지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수원에 사는 박모(35)씨는 길거리에서 싸움을 벌이는 허모(33)씨와 허씨의 여자친구(29)를 말리다가 생각지도 못한 고초를 겪었다. 허씨에게 폭행을 당해 눈뼈와 코뼈가 부러진 데다 허씨의 여자친구가 “가슴을 만졌다”며 성추행범으로 신고해 수개월간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를 받아야 했다. 결국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 박씨의 억울함은 담당 검사의 추궁으로 허씨가 자백한 이후에야 가까스로 풀렸다.

직장인 윤모(32)씨는 지난해 여름에 겪은 사건 이후 남의 일에는 절대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 새벽 시간대 길거리에서 술취한 20대 남성들의 살벌한 주먹다짐을 목격하고 중재에 나섰다가 봉변을 당한 거다. 경찰에 신고한 뒤 둘을 떼어 놓으려다가 얼굴에 주먹을 맞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죽일 듯이 싸우던 이들은 경찰이 도착하자마자 “친한 선후배 사이”라며 딴청을 피웠고 윤씨에게 되레 “장난인데 왜 일을 크게 만드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온라인에선 이같은 사례를 모아 ‘도와주고 누명쓰기’라며 △반전형(다투던 사람들이 태도를 바꾸는 경우) △증발형(피해자가 사라져 가해자로 몰리는 경우) △거부형(피해자가 범죄 피해 사실을 알리기 꺼려해 가해자로 몰리는 경우) △오해형(가해자가 사라져 가해자로 지목되는 경우) 등 유형까지 만들어져 공유되고 있다.

◆“학습된 외면”, ‘제노비스 2.0’의 등장

전문가들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주위 사람들의 위험을 외면하는 현상은 주변 목격자와 상관없이 ‘내가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앞서면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기존 ‘제노비스 신드롬’과는 결이 다르다고 분석했다.

이윤호 동국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사람들이 남의 일에 나섰다가 피의자로 몰리는 등 본전도 못 찾는다는 걸 언론보도를 통해 이미 충분히 학습한 상태”라며 “과거 제노비스 신드롬처럼 ‘나 말고 누군가 도와줄 거야’라는 수세적인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학습된 외면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제노비스 2.0’인 셈”이라고 분석했다.

가까운 중국에서는 이같은 일들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2006년 난징에서 일용 노동자인 펑위가 버스 승강장에서 쓰러진 노인을 도왔다가 가해자로 몰려 1심 재판부로부터 4만5000위안(약 743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펑위 사건’ 이후에도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란 식’의 봉변이 잇따르면서 중국에서는 ‘비에관셴스’(別管閑事·남의 일에 관여하지 마라)가 자녀교육의 제1조가 됐다.

이 교수는 “의인들이 푸대접을 받는 등 제대로 된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남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한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 해법될까

타인의 곤경을 외면하는 풍조가 확산하면서 “법으로라도 강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타인에 대한 구조행위를 법적으로 강제하는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강도를 만나 다친 유대인을 사마리아인이 구해줬다는 성경 내용에서 유래한 명칭) 법’을 제정하자는 거다.

유럽 주요 국가와 미국, 일본, 중국 등 다수의 국가에서는 이미 시행 중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6월 관련 법안이 입안돼 정치권에서 논의 중이다.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전 형사정책연구원장)는 “우리 형법체계가 독일식 법률에 영향을 받아 법과 도덕을 구별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법은 도덕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개인의 양심에 맡기기보다는 특별법 등을 제정해 일정한 강제성을 부여, 공동체가 지키려는 최소한의 윤리를 보호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개인의 도덕적 행위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반론이 만만치 않다. 애꿎은 범죄자를 양산할 우려가 있는 데다 실제 적용이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민만기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타인을 외면하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은 가능하겠지만 법률로 처벌하는 것은 실효성도 없고 윤리적으로도 잘못된 것”이라며 “선한 행위가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한 행위’로 폄하되면서 사회가 더욱 삭막해질 가능성이 높다. 법률이 아니라 윤리교육 강화 등으로 해결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제노비스 신드롬 2.0’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돼 타인에 대한 구조행위를 주저하게 된다는 기존 ‘제노비스 신드롬’(방관자 효과)과 달리 ‘제노비스 신드롬 2.0’은 주변 목격자와 상관 없이 ‘내가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앞서면서 나타나는 현상. 언론 보도 등을 통해 타인을 도왔다가 피의자로 몰리는 등 오히려 곤경에 빠진 사례가 대중적으로 학습되면서 나타난 모습으로, 적극적이고 학습된 외면으로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