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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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기획] 책도 맞춤형 시대… 서점가 '큐레이션' 바람

취향저격…베스트셀러를 내려놓다/출판계 한해 6만종 이상 발행… 책의 홍수/ 동네서점, 독자들에 맞춤서비스 차별화/ 전문가들의 식견에 기대려는 욕구 충족/‘당신에게 적합한 책’ 보증 의미도 담겨/ 큐레이터의 대중적 인지도 선택의 기준/ 대형서점 상업적 마케팅 변화 맞닥뜨려
직장인 박지수(29)씨는 요즘 책과의 권태기를 겪고 있다. 평소 한 달에 1∼2권의 책을 읽는 박씨지만, 책을 읽는 것에 점차 싫증을 느끼고 있다. 박씨는 “그동안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로 소개된 책을 주로 읽었다”면서 “남들이 읽으니까 나도 읽어봐야겠다는 의무감에 읽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그는 “그러다 보니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하는 책 사이에 딜레마가 생겼다”고 털어놨다. 그러던 중 박씨는 권태기를 해소해 줄 서점을 찾게 됐다. 박씨의 성격과 취미, 독서성향 등을 파악해 책을 골라주는 ‘큐레이션 서점’이다. 최근 서점가에는 독자의 취향과 관심사에 맞춰 책을 고르고 추천하는 ‘큐레이션’이 주목받고 있다. 라틴어로 ‘보살피다’는 뜻을 지닌 큐레이션은 ‘목적을 가지고 분류하는 작업’을 말한다. 서점가의 큐레이션은 독자들에게 개인화된 접근 방식으로 책을 추천하고 있다.


미술계 전유물처럼 쓰이던 ‘큐레이션’이 서점가로 확대되고 있다. 사진은 큐레이터가 손님에게 책을 추천하는 모습.
이재문 기자
◆오프라인서점 되살리는 ‘큐레이션’

서점가의 큐레이션은 동네서점이 주도하고 있다. 대형서점보다 책의 종수가 적은 동네서점들은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독자들에게 맞춤형 큐레이션을 제공하며 차별화를 추구하고 있다.

지난달 서울 성북동에 문을 연 ‘부쿠’(BUKU)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100만명이 넘는 팬을 보유한 ‘책 읽어주는 남자’가 공동대표로 운영하는 서점이다. 서점에는 분야가 다른 4명의 큐레이터가 독자들에게 책을 추천해주고 있다. 동네서점답게 한용운, 이육사, 이태준 등 지역 출신 문인들의 작품을 여럿 추천하고 있다. 부쿠의 나영란 큐레이터는 “서점을 찾는 손님들에게 다가가 책을 고르는 것을 돕고 있다”며 “매달 ‘이달의 작가’를 선정해 작품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라고 소개했다.

방송인 오상진·김소영 부부가 지난달 서울 합정동에 문을 연 ‘당인리 책 발전소’는 부부가 직접 책을 추천하는 서점이다. 서점 곳곳에는 부부가 추천하는 책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여성의 결혼과 임신, 육아를 다룬 책 ‘내가 엄마가 되어도 될까’에는 “엄마가 된다는 것. 저절로 되는 걸까? 나도 아직 안 되어봤지만”이라는 소개 글이 적혀 있다. ‘맨박스’에는 “남자를 위한 페미니즘 책”이라고 소개돼 있고, ‘무의미의 축제’에는 “갈 곳을 읽어버린 듯한 생의 의미. 쿤데라가 바라본 인생”이라고 적혀 있다.

새책이 아닌 헌책에 대한 큐레이션도 있다. 연세대 동아리 학생들이 만든 ‘설레어함’은 서울 청계천 헌책방들과 손잡고 중고책을 큐레이션한다. 홈페이지를 통해 감성, 여유, 긴박, 성찰, 지식 등 6가지 테마 중 하나를 선택하고 별도의 요청사항을 제시하면, 헌책방 주인들이 책을 큐레이션해 보내주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자판기를 통해 중고책을 큐레이션 하는 ‘설렘자판기’도 선보였다. 출판사들도 자체 서적을 대상으로 큐레이션에 나서고 있다. 창비는 지난 4월부터 모바일을 통한 시(詩) 큐레이션을 시작했다. 모바일 앱 ‘시요일’에는 그동안 창비가 펴낸 시집 3만3000여편이 실렸다. 앱은 날씨와 계절, 장소 등에 따라 시를 큐레이션 한다. 창비는 큐레이션을 위해 2년에 걸쳐 작품을 분석했다고 설명했다. 

큐레이션 서점 ‘부쿠’(BUKU)에서 큐레이터가 추천하는 책. 큐레이터가 추천하는 책의 주요 페이지에 표시가 돼 있다.
부쿠 제공
◆큐레이션 서점의 힘은 ‘사회적 증거’

큐레이션의 힘은 책을 고르고 추천하는 ‘큐레이터’에게 있다. ‘설득의 심리학’의 저자 로버트 치알디니는 “사람들은 수많은 선택지가 있을 때 신뢰할 수 있는 인물과 다수의 결정을 따라 한다”는 ‘사회적 증거의 법칙’을 주장했다. 서점의 큐레이션에는 “이 책이 당신에게 적합한 책입니다”라는 보증의 의미가 담기는데, 책을 추천하는 대상에 따라 신뢰도가 달라진다. 큐레이터가 가진 사회적 증거가 큐레이션의 근저가 되는 것이다. 최근 문을 연 큐레이션 서점들은 SNS의 유명인이나 방송인 등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 큐레이터를 맡은 경우가 많다. ‘어떤 책을 추천받느냐’만큼이나 ‘누가 책을 추천해주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출판시장에 출간되는 책의 종수가 늘면서 큐레이션의 필요성은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로버트 치알디니의 ‘사회적 증거의 법칙’은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시장에서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2015년 국내에 발행된 서적은 4만5213종에 이른다. 이 통계는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납본된 서적만 집계한 것이기 때문에 출판계에서는 한 해 발행되는 서적이 6만종 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독자 스스로가 책을 고르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아무리 큰 서점이라도 매년 생산되는 모든 책을 취급하긴 어렵다”며 “큐레이션은 전문적 식견을 가진 사람의 안목에 기대려는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대형서점에서는 아직 큐레이션이 활성화되지 않은 모습이다. 대다수의 대형서점들은 기존의 베스트셀러 및 신간 위주의 마케팅 일변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오히려 일부 대형서점들은 동네서점이 먼저 선보인 큐레이션과의 구색 맞추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대표적인 대형서점인 교보문고는 최근 매장 수를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지만, 책보다는 문구류와 굿즈 판매에 공들이고 있다. 또 서점 내 주요 공간에는 광고서적이나 신간을 주로 배치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대형서점이 큐레이션 기능을 사실상 포기한 채, 상업적 마케팅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백 대표는 “서점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 중 하나가 구매대행인 만큼, 독자들이 원하는 책을 발견 가능성이 높은 곳에 배치할 필요가 있다”며 “이제는 서점 스스로가 큐레이션 등을 통해 책을 팔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