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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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불편해도 괜찮은 영국 문화

몇 주 전 영국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런던은 말 그대로 ‘반짝반짝’했다. 거리마다 형형색색의 전등이 빛나고, 가게들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춰 유리창이나 외벽을 꾸몄다. 트래펄가광장 등 도심 곳곳에는 거대한 트리가 놓였다. 도시 전체가 일년 내내 크리스마스만 기다린 듯했다.

문득 ‘런던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면 로맨틱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취재 중 만난 영국인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기에는 지금이 더 좋다”며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슈퍼, 음식점, 백화점 등이 대부분 문을 닫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외식은 물론 물조차 사기 힘들다고 했다. ‘런던의 상징’인 관람차 ‘런던아이’도 운행을 멈춘단다. 한국의 설·추석처럼 가족과 보내는 명절 분위기라는 설명을 들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다음 이야기는 놀라웠다. 버스와 지하철, 기차도 운행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불편하지 않냐”는 말에 그는 “대중교통 기사들도 가족이 있으니 쉬어야지 않나. 다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불평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대뜸 ‘불편하다’고 생각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서울 태생이라 서울에서 명절을 보낸 적이 많다. 되돌아보면 명절에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게 생활했던 것 같다. 대중교통과 편의점은 늘 불을 밝혔고, 문 연 식당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명절 연휴에는 오히려 막차 시간이 연장되는 서울이 아니던가. ‘나의 휴일’에 일하는 이들을 보며 ‘고생하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들도 쉬어야 하는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연휴에 누리는 서비스를 당연시한 것이다.

김유나 사회2부 기자
다시 한국에 돌아와 365일 이용 가능한 지하철이나 버스, 편의점을 볼 때면 문득 영국이 떠오른다. ‘크리스마스만큼은 모두가 가족과 함께 쉬는 것이 당연하다’는 영국인들의 생각을 곱씹다 보니, 내가 누린 편리함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고된 노동이 따른다는 작은 깨달음(?)에 씁쓸해졌다.

국내 편의점들은 계약 시 연중무휴·24시간 영업을 강요당한다고 한다. 명절에는 아르바이트생을 구하지 못해 사장들이 며칠 밤을 새운다는 하소연을 들었다. 이는 업계가 개선해야 할 문제지만, 이런 분위기를 만든 데에는 ‘편의점은 언제든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인식이 한몫을 한 것은 아닐까. 나 역시 ‘저녁이 있는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내 휴식만 중시했을 뿐, 내 편의를 위한 다른 이들의 노동은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당장 한국에서 명절 연휴에 대중교통이 멈추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대중교통이 멈춰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쉴 때 쉬는 것은 모두의 당연한 권리’라는 영국의 문화만큼은 수입했으면 좋겠다. 내가 쉴 때도 서비스직은 늘 ‘스탠바이’ 상태로 대기하길 바라는 이기심은 없어지기를, 그래서 모두가 ‘조금 불편해도 괜찮다’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 내가 쉬는 날, 가게를 밝히고 버스를 움직이는 이들은 기계가 아니니까.

김유나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