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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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안전불감’ 여전한 겨울산행

무술년 새해 첫날 북한산에 올랐다. 틈날 때마다 같이 산을 타는 대학 선배와 함께였다. 그는 “산에 아직 눈이 쌓여 있을 테니 장갑과 아이젠을 꼭 챙기라”고 신신당부했다. 네팔 트레킹을 두 번이나 다녀온 준산악인의 말이라 유념해 들었다. 등산 셔츠와 바지를 꺼내 입고 목에 멀티스카프도 둘렀다. 배낭에는 전날 사둔 생수 세 병과 초코바를 챙겼다. 혹시 몰라 방한 점퍼 내피도 쑤셔 넣었다.

백운대를 목표로 삼고 걷기 시작했다. 정릉탐방지원센터에서 보국문을 향해 오르는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일부 응달진 곳을 제외하고는 눈과 얼음이 거의 다 녹아 있었다.

눈앞의 풍경이 180도 달라진 건 보국문에 다다라서였다. 능선길이 온통 눈밭이었다. 선배와 눈길을 주고받았다. 망설임 없이 배낭에서 아이젠을 꺼냈다. 성곽에 기대 끙끙대며 등산화에 채운 뒤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각뽀각 눈얼음에 꽂히는 쇠날 소리가 경쾌했다.

만경대를 지날 때쯤부터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눈에 들어오는 절경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사진 좀 찍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산비탈에 눈이 쌓여 봉우리마다 윤곽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첩첩산중’이라는 표현 그대로였다. 선배가 나직이 읊조렸다. “김정은이 중요한 결심을 할 때마다 백두산에 오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자연이 빚어낸 장엄한 아름다움 앞에 서니,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맞짱을 떠보겠다는 김정은의 호기까지는 아니어도 40대를 시작하는 개인적 다짐과 목표쯤은 간단히 이룰 수 있는 기운이 생기는 듯했다.

유태영 정치부 기자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무학대사가 새 왕조의 도읍을 조망하던 큰 광경에 다가서기까지는 약간의 시간과 돈, 체력을 들여야 했다.

북한산 최고봉 백운대의 겨울 광경은 여기에 하나를 더 요구했다. 최소한의 안전장비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백운대 정상 바위 급경사 구간은 완벽한 빙판이었다. 맨등산화·운동화 차림이라도 속도를 죽이고 주의를 기울이면 산행이 가능했던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의 균형감각과 난간에만 의지한 채 위태롭게 바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차 하며 미끄덩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뒷사람이 충분한 간격을 두지 않았더라면 아찔한 일이 빚어질 뻔했다. ‘미끄러짐 등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니 주의하라’고 적힌 경고판이 무색했다. 본인과 타인의 안전에 관한 의식은 용기와 과신, 방심, 무지, 준비소홀 사이 어디쯤 뒷전에 밀려난 듯했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가 3년간 통계를 분석한 결과 새해 첫날 서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고 유형이 산악사고라 하니 그저 우습게 볼 일만은 아니었다.

비상구만 제구실을 하게 놔뒀더라면, 불법주차된 차량으로 구조활동이 늦어지는 일이 없었더라면…. 결국 안전불감증이 화를 키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얼마 전 제천 화재 참사가 떠오르며 씁쓸해졌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지하철 안. 휴대전화를 켜니 강릉 경포119안전센터 앞을 가로막은 해맞이객 불법주차 사진이 인터넷 게시판을 달구고 있었다.

유태영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