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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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애경사 치부책을 불태우며…

얼마 전 장인상을 치른 후 부의금 명부를 봤다. 후회했다. 부의금을 내지 않은 지인들의 얼굴이 떠올라서다. 며칠간 “이 친구는 왜 부의를 안 했지”라는 물음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장례 후 부의를 하지 않은 지인을 만나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이 읽혔는지, 상대도 무척 당혹스러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 “혹시 내가 먼저 부의를 하지 않고서 괜한 의심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현묵 사회2부 부장대우
문득 어머니의 치부책이 생각났다. 시골에 살았던 어머니의 보물 1호는 ‘치부책’이었다. 치부책은 돈이나 물건이 들고 나는 것을 기록하는 작은 수첩을 말한다. 조선시대 상인들은 물건의 출납을 적은 수첩을 항상 윗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어머니는 옛날 노트에 다름 아닌 우리 가정의 애경사 때 조의나 축의를 한 이들의 이름과 금액을 적고 있었다. 어머니만의 치부책이었다. 어머니의 치부책을 보면 누가 우리 가정 애경사에 얼마를 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우리 형제들은 10여년 전 이 치부책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치부책을 건네주면서 “반드시 애경사 품앗이를 하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물론 나도 한 부 복사해 보관하고 있다.

내게는 또 한 권의 치부책이 있다. 결혼하면서부터 애경사 때마다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이름과 금액을 적어둔 노트다. 어머니 영향이 아닌가 싶다. 지인의 애경사가 있을 때마다 이 치부책을 보고 애경사 참석이나 부의금 액수를 결정하곤 했다. 아무리 친해도 내 치부책에 이름이 없으면 부의를 하지 않았다. 내게 애경사 부의는 단지 품앗이를 하는 정도였다. 그 이상이 아니었다. 애경사의 진정성이 없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 장인상을 치른 후에도 치부책을 떠들어봤다. 이름 옆에는 여러 색깔의 표시들이 있었다. 품앗이 여부를 확인하는 기호였다. 어떤 이름 위에는 빨간 줄이 그어져 있기도 했다.

치부책을 보면서 “너무 치졸하고 옹졸하지 않았던가”라는 비애감이 들었다. 치부책에 얽매여 있는 초라한 나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기계적으로 부의를 했던 게 얼마나 이기적인지 깨달았다. 누구든 사정이 생기면 애경사에 못 올 수 있는데도 나의 치부책은 이런 사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동안 보물처럼 보관했던 나의 치부책이 미워졌다. 그래서 나만의 공간에서 치부책을 조용히 불태웠다. 치부책만 태우는 게 아니었다. 그동안 옹졸하고 치졸했던 나의 마음도 연기 속에 날려버렸다.

치부책을 태운 후 얼마나 후련했는지 모른다. 치부책을 태운 후 몇 번의 애경사가 있었다. 품앗이가 아닌 나의 진정성을 담아 ‘성의’ 표시를 했다. 굳이 나의 애경사에 참석했는지, 얼마를 했는지 따질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진즉 이렇게 할걸, 때늦은 후회를 했다.

한현묵 사회2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