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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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유서 지니고 다니는 공포… '무법천지' 아프간

탈레반에 IS까지 가세 … 테러가 일상이 된 아프가니스탄/18년째 전쟁중… ‘무법천지’ 언제까지/유서 지니고 다니는 공포/美, 810조원 들여 아프간전 치렀지만/탈레반, 국토 40% 장악… 여전히 건재/IS도 존재감 과시… 한달새 1000명 희생/끝모를 비극 … 출구 없나/아프간 경제적 자립 최우선 과제 꼽혀/전문가 "트럼프 주변 압박전략 안통해/파키스탄 등 협력, 외교적 해법 찾아야"
“언제 어디에서 테러가 터질지 몰라 항상 유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공포를 상상이나 해보셨나요. 생각하기도 싫지만 만약 내가 심하게 다치거나 죽게 되면 누구인지 정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어요.”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사는 한 여성은 테러가 일상이 돼 버린 도시에서 생존의 절박함과 두려움을 털어놨다. 그는 “사라져버린 가족을 애타게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내 친구 하나도 실종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푸라기라도 잡아본다는 심정을 담아 소셜미디어에 그를 찾아 달라는 글을 올렸다”고 말했다.

다른 카불 시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서 자살폭탄이 터질지 모른다. 유서가 발견되면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 연락은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카불 경찰조차 “군이나 경찰의 힘만으로 사방팔방에서 터지는 테러의 위협을 막을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며 “대테러 장비도 부족해 희생되는 군인과 경찰의 수도 엄청나다”고 토로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보안당국 관계자들이 전날 수도 카불에서 발생한 구급차 자폭테러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카불=AP연합뉴스
◆한 달 동안 무차별 테러 희생자 수 1000여명

AFP, AP통신 등 외신들은 하루가 멀다고 아프간의 테러 발생 소식을 긴급뉴스로 타전하고 있다. 정부와 내전 중인 탈레반은 물론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까지 테러에 가담하고 있다. 이라크 모술과 시리아 락까에서 근거지를 잃은 IS는 아프간에서 탈레반과 결합하면서 카불의 치안상황을 극도로 악화시키고 있다.

2015년 아프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IS는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고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테러 수위를 높이고 있다. 국제분쟁 연구기관인 국제위기그룹(ICG)은 “지금 카불에서는 탈레반보다 IS가 오히려 더 위협적”이라는 분석을 내놓기까지 했다.

테러가 수차례 반복되면서 지난 1월 말 일주일 동안 아프간 전역에서 희생된 사람이 무려 200명 이상이다. 현지 언론은 1월 한 달 동안 아프간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이 테러와 총격전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카불 중심가에서 탈레반이 자살폭탄 테러를 벌여 103명이 숨지고 235명이 다쳤다. 탈레반은 지난달 21일에도 카불 인터콘티넨탈호텔을 공격해 20여명을 희생시켰다.

IS는 지난달 24일 국제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의 사무소까지 테러 대상으로 삼아 3명 이상이 사망했다. 29일에는 카불의 마셜 파힘 국방대학 입구에서 괴한 한 명이 자폭한 뒤 다섯명의 무장괴한이 경비병력과 총격전을 벌여 군인 2명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IS는 그 공격을 자신들이 감행했다고 밝혔다.
◆18년째 이어지는 전쟁과 눈덩이 피해

아프간에서는 올해로 18년째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의 가장 긴 전쟁’인 아프간전쟁은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자 미국이 국제테러단체 알카에다를 돕는 탈레반 정권의 뿌리를 뽑겠다며 시작됐다. 미국은 즉각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후 작전을 끝맺지 못하고 아프간에서 미 역사상 최장기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군 등 다국적군은 2014년 전투부대를 철군했지만 여전히 군인 1만3000명이 남아 있다. 미국은 이 전쟁을 위해 최대 10만명의 군인을 파병하고 7140억달러(약 810조원)를 쏟아부었다.

미국은 아프간전 개전 한 달 만에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으나 탈레반은 즉각 부활했고 아프간 곳곳을 재장악했다. 탈레반은 잔인한 자폭테러를 앞세워 아프간 정부에 대항하며 국토의 40%를 손에 넣었다. IS까지 가세한 아프간은 이미 무법천지로 변한 지 오래이며 미군의 피해도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미 국방부가 의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12개월간 아프간 내 미군 사상자는 모두 141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35% 급증했다. 사망자는 14명, 부상자는 127명이었다. 특히 최근 6개월 새 사상자가 큰 폭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미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2001년 아프간전쟁 개전 이후 사망자는 14만명이 넘는다. 유엔 자료는 “지난해 1월부터 9개월 동안 매일 평균 민간인 10명이 테러 등으로 숨졌다”고 밝히고 있다.

미군은 탈레반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공세적인 군사전략을 취하고 있지만, 탈레반은 오히려 더 대담하고 치명적인 테러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NYT는 아프간전쟁의 양상이 테러 중심으로 달라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탈레반이 정면대결을 피하면서 예측 불허의 테러 공격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수에도 해법 요원한 전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적극적인 군사 개입으로 아프간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여전히 출구는 잘 안 보이는 상황이다. 작년 8월 미군의 아프간 철군 기조를 뒤집어 현지 주둔 병력을 늘리겠다고 발표한 트럼프 대통령은 “탈레반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마지막에는 우리가 이길 것”이라며 국제사회에 ‘단호한 행동’을 촉구했다.

리더십 부재로 오합지졸의 모습을 보이는 아프간 정부군은 설상가상으로 부정부패까지 극심해지면서 아프간전쟁의 암울한 미래를 부각시키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아프간에서 부패 혐의로 기소된 군 관료는 현재 1000여명이나 된다.

군사·외교 전문가들은 경제 재건과 자립이라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으면 아프간전쟁은 희망이 없다고 지적한다. 인구 40%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아프간의 공식 실업률이 20%에 불과하다는 정부 발표조차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국민 대부분이 먹고살기 힘들다 보니 마약 재배 등으로 그나마 버티는 탈레반이 오히려 부각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군사뿐 아니라 외교적 해법도 함께 추구하는 방식으로 아프간전쟁 해법에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파키스탄이나 중국 등 주변국과 협력해 탈레반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프간전쟁의 중요 주변국인 파키스탄은 미국의 군사 지원을 받고 아프간전에 함께하고 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협력보다 압박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키스탄이 테러리스트를 비호한다면서 군사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발끈한 파키스탄은 미국과의 핵심 정보 공유를 중단, 당장 미국의 아프간 군사작전에 차질을 빚게 됐다.

워싱턴포스트(WP) 등 미국 언론들은 일제히 트럼프의 파키스탄 압박은 실효성 없이 고립만 자초하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 분석가들은 최근 카불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는 미국과 파키스탄 간 불화와 연계돼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상혁 선임기자 nex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