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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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창경궁 옆 옛 문체부 청사에서

주말 오후 창경궁 돌담길을 따라 대학로 쪽으로 걷다가 제법 낯익은, 하지만 요 몇 년은 찾지 않은 낡은 건물과 마주쳤다. 2013년 1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세종시로 옮기기 전까지 청사였던 곳이다. 원래 1970년대에 국립과학관 용도로 지었고 문체부를 거쳐 지금은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와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나눠 쓴다.

기자는 2013~2014년 문체부를 출입했다. 시작은 괜찮았다. 2013년 2월25일 취임식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문화융성’을 주요 국정기조로 선언했다. 그간 대통령과 친한 문화예술인이나 정치인을 주로 앉힌 문체부 장관에 손꼽히는 문화행정 전문가인 유진룡 전 차관을 발탁했다. 문화예술계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처음 창경궁 옆 문체부 청사에 발을 내디뎠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니 직원들 사기도 드높겠지’ 하는 선입관과 달리 정작 기자가 만난 문체부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웠다. 뭔가 언론을 피하려 하고 감추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청사 전체가 무거운 적막에 휩싸인 듯했다.

2014년 들어 상황은 더 나빠졌다. 대통령 눈 밖에 난 것으로 알려진 유진룡 장관은 ‘면직’이란 불명예스러운 형식으로 쫓기듯 떠났다. ‘유 장관 측근’으로 불린 간부 등 1급 공무원 6명이 사표 제출을 강요당했고 그중 3명은 결국 공직생활을 접었다.

검찰로 출입처를 옮긴 2016년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다. 박영수 특별검사의 수사에서 그간 쉬쉬해 온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드러났다. 과거 문체부 직원들 얼굴에 드리워졌던 짙은 그늘의 원인이 비로소 이해가 됐다. 출입기자로서 간담회 등에서 종종 접하고 관련 기사도 여럿 쓴 김종덕 전 장관의 구속 소식을 보도하며 자괴감이 들었다.

“문화예술계 전반에 대한 장기간의 차별적 지원을 통해 다수 문화예술계 종사자가 불이익을 당했다. 담당 직원들 또한 위법·부당한 지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직업적 양심에 반하는 업무를 고통스럽게 수행해야만 했다.”

법원이 박 전 대통령 1심에서 징역 24년 중형을 선고하며 밝힌 이유다. 그가 끝까지 부인한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도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수백, 수천년이 걸려도 이룰까 말까 한 문화융성을 5년짜리 단임제 정권이 목표로 내건 것 자체가 애당초 무모한 일이었다. 어쩌면 본인 표현대로 “문화예술계 좌편향을 바로잡는” 일을 문화융성으로 착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옛 문체부 청사 앞에는 과거 국립과학관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큼직한 기념비가 있다. ‘전 국민의 과학화. 1972년 2월12일.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한 사람이 국민 전체를 어떤 특정한 성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섬뜩하다. 어쩌면 블랙리스트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이 이루고자 했던 것도 ‘전 국민의 우향우’ 아닐까. 고작 5년 집권하고 물러날 정권이 모든 국민의 가치관을 좌우할 수 있다고 여기는 오만과 독선을 현 정부만큼은 제발 피해가길 바랄 뿐이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