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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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다시는 미투하지 않겠다”

안병호 전남 함평군수의 성폭력 범죄를 폭로한 피해자 4명 모두 경찰 조사를 받다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피해자 한 명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쓰러져 10일째 입원 치료 중이다. 두 명의 피해자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다른 한 명은 가족이 혹시 알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공황장애 증세가 재발했다.

이들 4명은 4년 전 안 군수에게 성폭행과 성폭력을 당했다. 이 끔찍한 일을 가슴에 묻고 지내다가 최근 확산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에 용기를 냈다. 이들의 성폭력 피해 사실은 지난 3월6일 세계일보 지면에 보도되면서 알려졌다. 이들은 미투를 하면 안 군수가 처벌받고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한현묵
사회2부 부장대우

세계일보에 보도된 날, 안 군수는 기자회견을 갖고 “성폭력은 사실무근으로 선거를 앞둔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고 부인했다. 안 군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피해자 3명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각각 2억원에 달하는 손해배상도 청구했다. 이들의 용기 있는 폭로는 ‘진실공방’으로 변질했다. 피해자들은 성범죄 가해자한테 오히려 고소를 당한 신세가 됐다.

기자는 지난 한 달 여간 성폭력 피해자의 아픔과 고통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피해자들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한 대목은 “피해 사실이 진짜일까?” “피해자들이 돈을 요구했다는 데···”라는 등의 터무니없는 소문이었다. 성폭력 가해자를 감싸거나 이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잘못된 인식이 여전하다. 성범죄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나서서 반박하거나 해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안 군수는 이런 점을 교묘하게 악용했다.

피해자들은 악성 루머가 확산하자 자신들의 미투를 후회했다. 안 군수의 ‘법대로’ 대응에 피해자들은 또 한 번 눈물을 삼켜야 했다. 성범죄 피해 입증 책임이 오롯이 피해자들 몫이기 때문이다. 4년 전 일로 증거가 남지 않아 피해 입증은 간단치 않았다. 성범죄의 유일한 증거는 피해자들의 신빙성 있는 진술이다. 이 때문에 경찰 수사가 피해자들의 진실을 밝히는 열쇠가 됐다. 피해자들은 경찰 조사에서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군수실에서, 모텔에서’ 당한 그날의 아픈 상처를 퍼즐 맞추듯이 맞춰나갔다.

경찰은 한 달간 수사 끝에 성범죄 피해 장소와 날짜를 특정하고 당시 정황을 구체화했다. 이런 기억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 피해자들은 적게는 5번, 많게는 8번 정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아무리 인권을 보호한다고 해도 경찰의 성범죄 조사는 피해자들의 수치심까지는 보호하지 못한다. 한 성폭행 피해자는 “경찰이 모텔에서 있었던 일을 분 단위로 물어봐 너무 당황했다”고 했다. 그는 이럴 줄 알았으면 미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피해자들은 앞으로도 그날의 수치심과 분노에서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경찰은 안 군수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피해자들에게는 검찰 수사와 법정 진술이 남았다. 진실을 밝혀내려면 지난날의 악몽을 되새기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최근 공공 부문에서 성폭력 ‘무관용 원칙’을 잇따라 선언하고 있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성폭력 없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한현묵 사회2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