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우리 안의 폭력성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시작으로 6월 항쟁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변곡점이 된 1987년. 당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 학교를 갔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그런데 아직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TV에서 최루가스가 터진 회색빛 거리에 청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형들(소위 백골단)이 시위대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던 화면이다. 그때는 공권력의 거리낌 없는 폭력이 당연시됐다. 어린 눈에 비친 그들은 무서웠지만, 그런 장면에 계속 노출되면서 ‘국가의 폭력’에 점차 둔감해졌다.

 중·고등학생 시절, 선생님들께 참 많이 맞았다. 스스로가 폭력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니 ‘폭력’의 대상이 됐음에도 ‘왜 매를 맞아야 하나’ 생각하지 못했다. “몇 대 맞을래”라고 묻는 선생님의 물음에 한 대라도 덜 맞을 방법만 찾았던 것 같다. 가끔 선생님의 오해로 체벌을 받아야 할 때도 ‘그냥 몇 대 맞고 말자’하고 넘길 때도 많았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가능성을 경계했던 것이다. 오랜 경험칙으로 ‘힘의 불균형’ 속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폭력에 길들여진 결과였을 것이다.

김선영 산업부 기자
폭력의 피해자는 가해자가 될 개연성도 높다. 고백하자면, 폭력의 가해자였던 경험이 있다. 10여년 전, 군대 전역 후 한 보습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며 체벌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학생들을 위한다는 마음에서 학부모들의 동의도 받았지만, ‘사랑의 매’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한다.

‘가정 폭력’, ‘학교 폭력’, ‘군대 폭력’, ‘데이트 폭력’, ‘주취 폭력’, ‘보복 폭력’ 등 우리 사회 전 영역에서 폭력은 횡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폭력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의 행위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오늘도 사회 내에서는 유·무형의 폭력이 되풀이되고 있다. 최근 큰 이슈가 됐던 한진그룹 일가의 ‘갑질’도 사실상 폭력의 다른 말이다. 그러나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잘 모르거나 알면서 행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폭력성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이 같은 폭력성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발간된 책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에서 평화학을 강의하는 정주진 강사는 “구조를 통해 가해지는 폭력이 바로 구조적 폭력”이라며 “구조적 폭력은 인간의 잠재성을 억압한다”고 말했다. 또한 “한 사회가 폭력적인지 아닌지는 인간의 잠재성이 얼마나 자유롭게 발현되는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도 적었다.

폭력은 많은 부분이 습관과 사회적 구조에서 비롯된다. 여자를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각인시킨 사회구조, 가진 자의 갑질과 폭력을 묵인하는 사회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정 강사는 “우리는 평화를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아이들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어려서부터 이를 실천해갈 수 있도록 독려하고 지원해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가정과 사회에서 평화 감수성을 키우고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지 않도록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폭력성’에 노출돼 그 피해자도, 가해자도 돼 봤던 입장에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김선영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