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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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옛 것과 새 것의 共存…그가 빚어낸 건 시간의 화해였다

〈177〉 印 건축 거장 발크리시나 도시 / 인도 최초로 올해 프리츠커상 수상 / ‘현대건축 아버지’ 코르뷔지에 등과 협업 / 신·구 조화 이룬 자신 만의 세계 구축 / 전통과 모더니즘의 정신 잇는 다리로 / 소외계층 위한 주거 단지 만드는 등 / 빈부차 심한 고국 위해 평생 고민 / 그가 남긴 건축물은 건축 그 이상이었다
# 당갈, 뻔한데도 감동을 주는 이야기

주변에 흔했던 것들이 많이 사라졌다. 동네마다 있었던 구멍가게, 철물점, 서점, 만화가게처럼 일상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보였던 곳들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 우리 곁에서 사라져 버렸다. 물론 일정한 주기로 사회가 성장하고 삶의 형태가 바뀌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 몸이 성장하고 신진대사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겠지만, 적당히 남아 있는 것도 있고 좋은 것은 좀 살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더군다나 동네라는 개념과 공동체의 틀이 지나치게 급격하고 비정상적으로 바뀌면서 사회에 대한 구성원들의 인식 또한 무척 무뎌지고 느슨해지고 있지 않나 싶다.

동네마다 있었던 영화관들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개봉과 재개봉관, 동시상영관 등 극장에 따라 나름 위계가 있었고 가격의 차이도 컸다. 그래서 돈이 부족하거나 시간을 때우고자 할 때는 동네 동시상영관에 앉아서 하루 종일 환상의 세계를 경험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휴대폰과 멀티플렉스가 그런 식의 소비를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요즘의 영화관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행위 이상의 즐거움을 위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가서 즐기면 된다. 그러나 팝콘과 음료를 들고 백화점처럼 영화들이 죽 널려 있는 극장에서 미로를 헤매다 직원이 알려주는 번호의 문으로 들어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마치 디스토피아를 표현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욕망이 포장된 통조림을 열고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내용물을 흡입하고 섭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영화 상영관이 어릴 적 동네 극장이 주던 정서적인 느낌이 없어서인지, 필요 이상의 까다로움 때문인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아주 가끔 본다. 어찌 보면 나의 정서를 키워준 것은 ‘팔할이 영화’였고, 그것은 대부분 동네 극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름 나의 영화에 대한 순정이기도 하다.

최근 아주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서 ‘당갈’이라는 인도 영화를 보았다. 큰 딸이 어느 날 “당갈, 당갈”하면서 영화가 너무나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고 극찬하며 아무래도 몇 번 더 볼 것 같다고 노래를 부르며 무언의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인도 영화를 본 적이 없고, 보러 가면서도 왠지 팝송에 익숙한 내가 갑자기 샹송이나 칸초네를 듣는 것처럼 적응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당갈’은 인도 현지의 레슬링 대회를 뜻하는 말이다. 2016년 인도에서는 무려 360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관객을 동원한, 인도 영화 최고의 걸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블록버스터 영화가 동시에 개봉해서인지 그중 가장 작은 상영관을 배정받은 데다 하루에 몇 번 상영하지도 않았다. 상영관은 작아서 아늑하고 사람이 붐비지 않아 좋긴 했지만 러닝타임이 조금 길어서 걱정을 하며 들어갔다.

내용은 무척 단순했다. 아빠와 딸의 갈등, 그리고 화해와 성공. 물론 그런 스토리 라인을 대충 듣고 갔으니 영화에 대해 큰 기대는 없었다. 실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인데,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 삽입된 많은 설정이 있고 인도 영화 특유의 과장과 영화적인 클리셰가 다수 등장한다.

그러나 감동적이다. 내용을 알고 갔음에도 감동을 받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인도라는 여성인권이 열악한 사회에서 만든 여성에 대한 다른 시선의 영화라는 점이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가족의 이야기이며 사회의 통념에 저항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도시의 스튜디오는 ‘함께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고, 정원과 야외 원형 운동장을 포함한 공동공간의 배치는 협력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 전통을 지키거나 거부하거나

주인공인 마하비르 싱 포갓은 레슬링 선수로 성공하여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와 생활고로 꿈을 접은 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간다. 대신 자신의 못 다한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자 했으나 내리 딸만 넷을 낳으며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감정의 기복도 없고 표정도 별로 없는 마하비르의 좌절은 어느 날 이상한 일로 출구를 찾게 된다. 언제나처럼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 마당에 부인과 딸들에게 몇 명의 이웃이 뭐라고 한창 따지는 중이었다. 그의 딸 기타와 바비타가 자신을 놀리는 동네 남자아이들을 흠씬 두들겨 팼기 때문이었다. 얻어맞아 엉망이 된 남자아이들의 부모가 아이를 옆에 세워 놓고 항의하는 중이었다.

순간 마하비르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지지만, 그는 표정을 감추곤 이내 이웃에게 사과를 하며 돌려보낸다. 마하비르는 괄괄한 딸들에게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을 본 것이다.

그는 다음날부터 딸들을 새벽 다섯 시에 깨워 체력을 단련시키는 강훈련에 돌입한다. 인도라는 사회가 원래 그렇지만 마하비르가 사는 지역은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한 곳이었기에, 그의 행동은 무척 유별난 짓이었고 딸들은 동네와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딸들을 훈련시키고 시합에 내보내며 굉장한 성과를 얻게 된다. 어찌 보면 그의 행동은 단순히 개인의 한을 푸는 차원이 아니고 인습에 대한 반항이고 차별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 일정한 나이가 되면 결혼하고 집안을 위해 조용히 내조하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만들고 꿈을 실현하며 스스로 일어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큰딸 기타는 국가대표 아카데미에 입소하게 된다. 그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하던 기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고, 그간 아버지에게 배운 모든 것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며 잊어버리라는 코치의 강요를 받으며 무척 흔들린다.

익히 예상되는 그런 갈등은 뻔해 보이지만 감동적이었다. 새로운 훈련에 익숙해지면서 아버지의 방식을 진부하다고 거부했던 기타는 세계대회에서 계속 패배하며 혼란에 빠지는데, 공격에 재능을 가진 기타를 수비 위주로 훈련시킨 코치와의 갈등 등 여러 가지 역경을 극복하고 힘들게 세계대회 결승에 오른다. 결승에서도 기적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며 아버지의 염원인 금메달을 따게 된다.

2시간40여분의 긴 영화였지만 지루하기는커녕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밌게 보았다. 실화에서 오는 이야기의 힘과, 인도 국민배우이자 감독이라는 아버지 역할의 아미르 칸과 긴박감 넘치는 레슬링 경기를 실감나게 구현해 낸 배우들의 열연이 무척 돋보였다. 익히 예상되는 전개이지만 큰딸 기타와 아버지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통을 거부한 아버지가 어느 순간 다시 거부해야 할 낡은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모순은 인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갈등이다. 영화에서 극적 재미를 위해 악역으로 설정된 코치는 선수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익히게 하고 자유시간을 준다. 언뜻 보기엔 전혀 문제가 없다. 간식도 못 먹고 여가도 없이 종일 훈련에만 몰입했던 기타는 드라마를 보거나 쇼핑을 하거나 외모를 꾸미며 말하자면 세련된 현대인의 일상을 영유하게 된다.

마치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듯 고향마을과 도시의 일상적 경험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기타가 겪는 혼란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20세기 전후 근대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국가, 도시들이 겪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문화는 낡은 것으로 여겨지고 버려졌다. 마치 우리가 한옥에서 나와 한복을 벗고 양복을 입고 입식생활을 하는 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했듯이, 기타는 낡은 인습에서는 해방시켜 주었지만 자신의 유년기를 구속했던 아버지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며 모래밭에서 아버지를 메친다.

# 현대건축가의 교훈과 전통문화에 대한 경외

2018년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인도 건축가 발크리시나 도시(Balkrishna Doshi)가 선정되었다. 그는 인도에서 이 상을 최초로 수상한 건축가이다. 1927년생이니 우리나라 나이로는 92세인데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놀랍다.

언제부터인가 이 상이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면서 매년 수상자가 발표가 될 때마다 알 만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뉴스가 되었다. 1979년 당시 73세였던 필립 존슨(1906∼2005)이 첫 번째 수상자가 된 이래 주로 건축계에 큰 업적을 남긴 원로 건축가에게 주는 상인 듯싶었으나, 도시보다 1살 많은 영국 건축가 제임스 스털링(1926~1992)은 무려 37년 전인 1981년에 수상했다. 즉 국적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건축가로서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거나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고민과 실천을 보여준 건축가에게 주어지는 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왼쪽)와 그를 스승으로 생각한 발크리시나 도시.
도시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절묘한 성격의 건축가이다. 그는 현대건축의 문을 연 건축가들과 협업을 하며 건축을 배웠다. 그리고 20대 후반에 사무실을 내며 가난한 사람을 위한 건축을 하겠다는 서원을 마음속으로 다짐했었고 평생 작업을 통해 실천했다고 한다.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면서도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를 찾아가 일을 배우던 그는 1954년 인도로 돌아와 찬디가르(Chandigarh)와 아흐메다바드(Ahmedabad) 등에서 지어지는 코르뷔지에의 프로젝트들을 감독했다. 1962년부터는 루이 칸(Louis Kahn)과 협력하여 인도경영연구소를 설립하여 10년 이상 함께 일했다. 그는 서양건축가로부터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자신이 간직한 과거의 기억과 경험했던 자연과 인도의 문화 및 역사에 대한 깊은 경외를 담은 수많은 작업을 했다.

그의 수상은 무척 많은 의미가 있다. 20세기 현대건축의 문을 연 거장들, 그들은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흐릿하지만 건축의 전설 혹은 건축적 도그마로 남아 있는데, 마치 바통을 이어주듯 도시가 모더니즘의 정신을 연결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더니즘이라는 몸과 인도의 전통건축이라는 영혼이 적절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배합된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또한 그의 수상은 굉장히 독특한 문화적, 사회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서구 위주의 현대건축에서 변방 취급을 받던 인도의 건축을 들여다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진과 홍수,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반복되는 인도의 자연환경은 무척 가혹하다고 한다. 따라서 고대부터 인도에서는 신의 힘을 빌려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종교가 번성했고, 예술과 문화에도 그런 성격이 반영되었다.

아란야 저비용 주거단지는 주택, 안뜰 및 내부 경로의 미로 시스템을 통해 8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수용한다.
특히 계층의 구분이 분명하고 빈부 격차가 심한 사회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에게는 삶의 질을 담보하는 건축에 대한 고민이 가장 깊었을 것이다. 그가 설계한 아란야 저비용 주거단지(Aranya Low Cost Housing, Indore, 1989)는 주택, 안뜰 및 내부 경로의 미로 시스템을 통해 8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수용한다. 저소득층과 중산층 거주자를 위해 지어진 6500개가 넘는 주택은 소박한 유니트 단위에서 넓은 집까지 다양하다. 겹쳐진 층과 중간영역들은 인도 사회에서 유동적이고 적응 가능한 생활환경을 제공한다.

그의 앞으로 흘러간 시간이 무려 90년이다. 그는 그 세월을 보내며 오래된 것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평생 집을 짓고 건축을 이어나갔다. 도시의 프리츠커 수상은 그가 몇 개의 놀라운 건축물을 우리 앞에 보여준 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세대의 화해와 봉합을 이룬 사람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경험은 가장 훌륭한 건축가의 자산이며 시간은 가장 훌륭한 건축의 재료이다. 발크리시나 도시의 건축이 그렇다.

가온건축 공동대표·『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공동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