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차 한잔 나누며] “비난·협박에도… 확신있다면 부정적 의견 말해야”

‘한국의 닥터 둠’ 이종우 前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29년 증권사 애널리스트 생활 끝/이코노미스트로 새로운 삶 시작/닷컴버블·글로벌 금융위기 예견/
하락장 경고… 온갖 비난 시달려/대세 편승한 삶, 편해도 옳진 않아/소신 의견 내다보면 자유로워져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용기 있다는 칭찬도 듣지만 불편한 이야기를 한다는 비난도 감당해야 한다. 특히나 ‘큰돈’이 걸린 주식시장에서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일생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이가 있다.

‘한국의 닥터 둠’으로 불리는 국내 최장수 애널리스트, 이종우 전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의 이야기다. 이 전 센터장은 2000년 닷컴 버블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앞두고 하락장을 경고해 이 같은 별명이 붙었다. 닥터 둠(Doom·파멸)은 1987년 미국 투자전략가 마크 파버가 뉴욕 증시 대폭락을 예견하면서 붙은 경제비관론자의 별칭이다.

지난 5월을 끝으로 만 29년의 증권사 애널리스트 생활을 청산하고 이코노미스트(경제전문가)의 길을 걷고 있는 이종우 전 센터장을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만났다. 그는 “신문에 경제 칼럼을 쓰고, 경제 방송과 강의 등을 하며 지내고 있다. 증권사를 나온 요즘이 더 행복하다”며 “애널리스트의 삶은 잘 맞았지만 센터장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평가하고 관리하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아 불편했다”고 특유의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소회를 밝혔다.

이 전 센터장은 1989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우경제연구소 조사부를 시작으로 여의도에 처음 발을 들였다. “원래 대학교수를 하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공부를 더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찾은 곳이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은 연구소였다”고 했다. 이어 “당시 대우경제연구소의 위상은 대단했다. 직원의 80%가 대학원을 나오거나 유학파였다”며 “경제학 학사만 갖고는 밥 먹고 살기 힘들 것 같아 증권사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 1993년부터 4년간 대우투자자문에서 펀드매니저로 잠시 외도한 기간을 제외하면 그는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투자전략팀장, 미래에셋증권 운영전략센터 실장을 거쳐 한화투자증권·교보증권·HMC투자증권(현 현대차증권)·아이엠투자증권(현 메리츠종금증권)·IBK투자증권에서 무려 16년간 리서치센터장을 맡았다.

이종우 전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이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로비에서 29년간의 애널리스트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그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3년 카드 대란, 2008년 금융위기 등 여러 차례 경제 위기를 여의도에서 몸소 체험했다. 이 전 센터장은 “외환위기 때 우리(대우증권) 옆 건물에 동서증권이 있었다. 당시 업계 4위 정도의 회사였는데 어느 날 조간신문에 모회사인 극동건설이 경영난으로 증권사를 매각한다는 기사가 났다”며 “그리고 6시간 만에 회사가 망해버렸다. 기사를 본 사람들이 회사로 몰려들어 돈을 인출하기 시작하자 2시간도 채 버티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매일 아침 수백명이 출근하던 회사로 다음날부터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경제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그가 냉정한 시각으로 시장을 바라보게 된 것도 이때쯤부터다.

시장에 경고를 내놓을 때면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비관적인 전망을 하면 회사로 전화가 빗발쳤다. ‘당신 배에는 칼이 안 들어갈 줄 아느냐’는 협박도 부지기수였다”며 “정부와 업계에서는 한창 ‘바이코리아’를 외치던 시기라 ‘너 혼자만 살자는 거냐’는 등 비난을 많이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애널리스트가 ‘매도 의견’을 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자기 확신이 없고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말만 하고 대세에 편승하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인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매도 의견을 내면 해당 기업이 기업탐방을 거부한다거나 주주가 항의한다고 하지만 그건 해보지도 않고 하는 핑계”라며 “부정적 지수 전망도 그런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결국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자유로워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미래가 밝은 업종에 관해 물었다. 이 전 센터장은 “전기차나 자율주행차도 놀라운 기술이지만 과연 사람들이 그 기술을 얼마나 사용할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휴대전화만 해도 지금의 한 형태가 되기까지 삐삐, 시티폰 등 수많은 제품과 기업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결과”라고 했다. 그는 당장은 아니지만 결국 인간의 수명 연장이나 질병 문제를 해결해 줄 바이오 기업이 나온다면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이오는 사람의 욕망과 관련된 영역이기 때문에 혁신적인 기업이 나타난다면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주변에서는 경제연구소를 세우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그럴싸한 명함이 진정 내가 원하는 길인지 고민스럽다”며 “지금처럼 자유로운 이코노미스트의 길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올가을 서울에서 출발해 경남 김해까지 걸어서 한국을 종단하며 숨가쁘게 지나온 30여년을 되돌아볼 계획이다.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