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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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빈곤 포르노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는 인도의 두 소년 앞에 고기와 과일이 푸짐한 식탁이 차려 있다. 식욕을 자극하는 빨간색 식탁보 위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지 못하는 상황은 영양 섭취를 못해 배가 불룩 나온 소년의 이미지와 대비됐다. 며칠 전 이탈리아 사진작가가 찍은 ‘꿈의 음식’이란 사진 시리즈가 가난을 악용한 인권 유린이라며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심지어 해당 음식이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모형이란 사실이 드러나 배고픈 소년을 놀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국내 한 국제구호단체의 후원 광고에는 ‘할리퀸 어린선(비늘증)’이란 희귀난치병을 앓는 어린 소녀가 나온다. 온몸에 피부 각질이 퍼지는 병을 앓아 매일 목욕하고 약과 보습제를 발라도 살이 타는 듯한 아픔에 시달린다. 1분30초 광고는 소녀의 얼굴, 몸에 퍼진 각질과 상처, 괴로워하는 울음소리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너무 묘사가 자세해 보기 힘들다는 민원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4건이나 접수됐다.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는 초상권이나 인권 방어에 나설 수 없는 사회적 약자를 자극적으로 묘사해 모금을 호소하는 광고를 말한다. 갈비뼈가 앙상한 기아 아동 등 자극적 이미지나 ‘엄마가 되어 줄게’ 같은 감성적 문구를 쓴다. 빈곤 포르노 개념은 국제 자선 캠페인이 급증한 1980년대에 등장했다. 당시 캠페인 영상에는 가슴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깡마른 아프리카 아이 몸에 파리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어 충격을 줬다. 생방송으로 제작된 프로그램은 수천만∼수억달러를 모금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러다 보니 부작용이 나타났다. 에티오피아 식수난을 촬영하려던 외국의 한 방송국이 생각보다 물이 깨끗하자 어린 소녀에게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도록 연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연출된 가난’은 상투적인 틀에 꿰맞춰 가난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 국내외 인권단체들은 빈곤 문제를 선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고 비판한다. 어제 방통위는 국내 대형 구호단체들의 인권 침해 또는 자극적인 기부금품 후원 광고를 규제하기로 했다. 후원 모금 극대화도 좋지만 진실마저 왜곡해서야 되겠는가.

채희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