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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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 “직업병, 사회 공동의 문제… 해결책 함께 고민해야”

양길승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 / 1988년 ‘원진레이온 사태’ 이후 / 직업병 인정 유의미한 변화 일궈 / 위험 지역서 일하지 않을 거부권 / 제대로 보장돼야 사고 반복 막아 / 인정 기준 근로자 입장 더 반영 / 개선 위해 공공의 역할 강화되길
“직업병이란 노동자, 기업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문제로 폭넓게 인식하고 함께 필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지난 1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만난 양길승(69)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은 아침부터 건강검진을 위해 내원한 환자들을 진료 중이었다. 현장에서 환자를 직접 만나는 한편 한국 사회에서 산업재해 및 직업병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는 “작업환경을 잘 관리하면 작업장 내 노동자는 물론 작업장 주변의 주민들까지 잘 살게 돼 사회가 건강해진다”고 강조했다.
양길승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이 지난 1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직업병 인정과 관련한 제도 개선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녹색병원은 산재·직업병·인권침해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민간 차원에서 운영하는 공익병원이다. 이 병원의 탄생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역대 최악의 산업재해로 꼽히는 1988년 원진레이온 사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기 구리 소재의 원진레이온은 펄프에 이황화탄소(CS₂), 황화수소, 황산 등을 써서 인견사(실의 일종)를 만드는 업체였다. 이 업체에서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정신질환을 비롯한 뇌경색, 협심증 등 다양한 질환을 호소하는 노동자가 늘어났다. 결국 900명이 넘는 피해자가 발생했고 수백명이 사망했다.

이후 수십년간 진통을 겪으며 우리나라 안전보건제도 개선 및 안전보건공단 설립 등으로 이어졌다. 다른 한편에서는 원진레이온 폐업 뒤 피해자 지원·보상을 위해 원진직업병관리재단(1993년)이 세워졌고, 이후 녹색병원(2003년)이 개원했다. 양 이사장은 원진레이온 사태와 관련해 1980년대 역학조사에 참여한 것은 물론 현재에도 피해자들과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의학적으로 ‘명백한’ 인과관계를 요구했던 직업병 인정기준이 직업경력과 병세의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상당한’ 인과관계로 바뀌도록 큰 획을 긋게 됐다”고 말했다.

원진레이온 사태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 CS₂에 폭로돼 직업병 문제가 불거지자 해당 공장이 문을 닫고 일본으로 옮겨갔다. 1960년대 일본에서도 직업병 환자들이 발생하자 우리나라로 이전했다. 1993년 원진레이온이 폐업한 뒤에는 해당 장비와 기술은 중국으로 옮겨갔다. 글로벌 기업이 싼 노동력을 찾아 이동하면서 직업병을 옮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왜 직업병이 인정되기 힘들었던 것일까. 양 이사장은 몸소 경험했던 사례를 소개했다. 그가 과거 구로공단에서 의원을 운영할 당시 찾아온 환자들이 이상하게도 진찰 시 손을 잘 내밀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들이었다. 프레스기에는 자동감식 기능이 있어 손가락이 잘릴 수 없는 구조인데 한 달이면 잘린 손가락이 숱하게 많았다. 양 이사장은 “멈추면 생산량이 줄어드니 자동감식기를 떼고 사고가 안 나기를 바란 것이 주원인이었다”며 “예방할 수 있는 것을 무시해 반복재해로 만드는 양상은 요즈음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건설현장 사고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건설현장에서 2만5649명의 산업재해자가 발생해 이 중 579명이 숨졌다. 양 이사장은 노동자의 3가지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바로 △알 권리 △참여할 권리 △거부할 권리다. 양 이사장은 “알 권리는 정보공개 등 각종 제도를 통해 어느 정도 보장됐고, 참여할 권리는 10% 미만의 조직률로 미약하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데, 거부할 권리는 파업권과 관련된 부분이 있어 정부가 제대로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건설인부가 추락해 사망한 현장에서 대책 및 재발 방지가 확정되지 않는 한 작업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이 잘 이뤄지지 않다 보니 같은 곳에서 다시 사망사고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원진레이온 사태로부터 30년이 흐른 올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 피해보상과 관련한 합의가 이뤄졌다. 이 또한 10년이 넘는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양 이사장은 “과거 사용자 입장에서 결정하던 직업병 인정기준이 좀 더 노동자 입장에서 판단될 수 있도록 공공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