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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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폭염과 냉방권

중복은 지나갔고 말복(16일)이 다가온다. 복(伏)은 사람 인(人)과 개 견(犬)을 담고 있다. 날씨가 덥다 보니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지낸다는 뜻이다. 올해 무더위는 더욱 심하다. 개 흉내로 넘길 차원이 아니다. 오죽하면 “인공강우를 내려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등장하겠나.

옛 특권층은 어찌 견뎠을까. 로마 황제 엘레가발루스는 고산지대로 사람을 보내 눈을 가져오게 했다. 우리나라의 옛 권력층은 얼음을 보관하는 석빙고를 둬 폭염 때 꺼내 썼다. 얼음과 눈이 일반인의 도우미로 변신한 것은 미국 청년 사업가 프레더릭 튜더의 모험적 시도 덕분이다.

그는 1806년 겨울 호수의 얼음을 채빙, 서인도제도의 화산섬 아르티니크로 운송해 원주민에게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첫 채빙 분량은 80t 규모였다. 그러나 첫 얼음 상품은 운송 과정에서 거의 다 녹아버렸고, 남은 얼음도 팔리지 않았다. 화산섬 원주민들이 뭔 용도인지 알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폭염 대응을 가장 획기적으로 바꾼 것은 1902년 등장한 에어컨이다. 원래 용도는 냉방과 무관했다. 인쇄소 습도 통제를 위한 고민이 뜻밖의 성과를 낳은 것이다. 윌리스 캐리어는 자신의 발명품에 ‘웨더메이커(Weathermaker)’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로 날카롭게도.

현대 문명이 에어컨 없이 유지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2016년 미 경제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에어컨이 사망률을 낮추고 생산성을 높이고 국민 후생에 기여한다는 결론을 냈다. 대한민국 사정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엊그제 ‘폭염 전기료’ 대책을 내놓았다. 7∼8월 전기료를 19.5% 인하하는 내용이다. 선심을 쓴 것이다. 하지만 국민 반응은 시원치 않다. 아무런 걱정 없이 에어컨을 틀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인 탓이다. 탈원전 정책 기조에 대한 불만도 적잖게 작용하고 있다.

냉방권이 기본권이란 인식이 번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최근 “냉방기기 사용을 국민의 건강, 생명과 직결된 기본적인 복지로 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정부가 고민할 것은 값싼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방안이다. 탈원전이 답일 수 있겠나. 구렁이 담 넘듯 얼렁뚱땅 이 시기만 넘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승현 논설고문